새실은 외가다. 엄마가 자라고 살았던 땅이다. 엄마는 광복이 되는 해에 일본에서 연락선을 타고 한국으로 오셨다. 외할머니 품에 안겨서 이 땅을 밟았으니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갓난 아기 때부터 이곳의 기운으로 먹고 노닐며 자랐으니 고향인 셈이다.
뒤로는 이명산이 둘러 있고 앞으로는 황새모양을 닮은 산이 있어 '새실'이다. 더 멀리로는 소오산이 희미하게 우뚝 솟아 있는 깊은 산골이다. 육이오 전쟁 중에는 군인들이 피신을 왔다. 어떨 때는 국군이 들어왔다가 며칠 쉬어가고 어떨 때는 인민군이 들어오기도 했단다. 예닐곱 살밖에 안 된 엄마는 복장이 다르고 총을 들고 다니는 그들이 기억에 남는다고 하셨다. 헛간이나 마루 밑에 숨어 지내고 언제나 눈치를 살폈단다. 허기에 절어 고구마든, 밥이든 무엇이든 먹을 것을 주면 그렇게 잘 먹고 고마워하다가도 순식간에 야생 산짐승의 눈빛을 번뜩이며 철커덕 총부리를 겨누기도 했다고 그 시절을 회상하셨다. 한 겨레 동포에게 총부리를 겨눈 뼈아픈 우리 역사의 한 장면이 골골산천 새실에도 스쳤던 게다.
이명산 능선 아래로는 외가의 선산이 있고 외할머니가 오르내리며 가꾸는 밭뙈기가 가로로 길게 누워있다. 그 밭에서 깨며, 고추며, 콩을 심고 키우셨다. 여름철엔 살이 통통한 강냉이도 한 소쿠리씩 걷어 오셨다. 동네 앞뜰에는 논이 층층이 펼쳐지고 작은 저수지가 사철 마르지 않고 넉넉히 물을 담는다. 외가 가는 길목에서 ‘이 곳이 새실이오’ 제일 먼저 알리는 저수지다.
내 고향 한재에서 외가 새실까지는 삼십 리 길이다. 빨간버스를 타고 이십 리를 덜컹덜컹 달리다가 번화가가 끝나는 삼거리에서 내린다. 이젠 북으로 북으로 걸어야 한다.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기나긴 비포장도로. 울툴불퉁 자갈길에 먼지가 폴폴 날렸다. 택시비는 오천 원. 지금 시세로 오만 원쯤 될까. 그렇게 비싼 차비를 들여서 택시를 타고 갈 엄마가 아니다. 시오리 자갈길을 엄마는 나를 업고 다녔다. 걸리다가 업었다가를 반복하며 어린 딸을 달래며 타박타박 걸었다.
월운으로 갈리는 방앗간 옆 삼거리에서 왼쪽길로 들어서면 저수지가 있다. 저수지 아랫길을 돌아 올라서면 구영실 마을이다. 미친 여자가 저녁 굴뚝 연기처럼 나풀거리며 난리를 피우던 그 마을. 이층집이 있었는데 이젠 그 흔적도 없다. 외가로 넘어가는 구영실 고개는 지리산 천왕봉만큼 높은 바윗길이었다. 엉금엉금 기어서 오르던 그 길은 큰비가 온 뒤에는 더욱 험하고 가팔랐다. 그 고개를 넘어서니 서쪽 하늘로 넘어가는 해가 붉다. 핏빛 심장처럼 선홍색으로 이글거리며 기울고 있다. 고갯마루를 넘어서면 산밑으로 난 또랑을 따라 좁은 길을 걸어야 한다. 외사촌 오빠가 고등학교를 다니고 윗대에선 외삼촌들과 막내 이모가 학교 다니던 길이다.
이명산자락을 타고 한 바퀴 돌면 오른쪽 저 골짝에 새실이 있다. 저녁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훠이훠이 누군가 개나 고양이 쫓는 목소리가 울리고 누렁소가 움머움머 울음으로 반기는 곳. 엄마가 자랐던 곳, 외할머니가 계신 곳이다. 저수지를 지나고 작은 외삼촌 논을 지나고 개울을 건너면 동네 초입에 있는 키 큰 소나무가 제일 먼저 반긴다. 그 솔밭 등성이를 오르면 새실이 바로 코앞이다. 가실 아재집 대나무 울타리를 지나고 왼쪽으로 들어서면 외할머니가 계신 외갓집 담벼락이 칸칸이 흙을 낀 돌담으로 늘어선다. 이층 공루가 말씀 없으신 외할아버지처럼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어떨 때는 타박타박, 어떨 때는 쪼르르르. 엄마 기분에 따라 내 기분도, 내 발걸음도 다르게 달린다. 그 옛날 반기던 외할머니, 반가운 마음과 눈물 어린 젊은 엄마가 끈끈하게 만나던 그 마당. 엄마는 울지 않았다. 딱 한 번. 한 번은 원망 섞인 목소리로 목놓아 울었다. 그러나 두 번은 없었다. 울음이 현실 상황을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걸 이미 알아버린 젊고 어린 엄마다. 그 마음으로 한평생 소오산처럼 늘 제자리를 지킨 엄마다. 딸로서, 며느리로서, 엄마로서.
북극성처럼 늘 그 자리에서 빛을 발하는 것은 ‘타자공헌’이라고 하던가. 어쩜 엄마한테 이토록 꼭 들어맞는 말이 있을까 싶다.
이명산 너머로는 집안 할아버지와 어른들이 사시는 월운이 있다. 방학 때면 사촌 오라버니를 따라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러 가곤 했다. 하얀 모시옷 차림으로 누각에 계시면 올라가서 큰절을 올리고 한재 어른들 안부를 전했고, 밖에 계시지 않으면 동네 안을 골목골목 누비고 다니며 인사를 드렸다. 월운에는 한재 할아버지도 계셨다. 한재에서 시집온 할머니가 계시는 걸 보면 월운과 한재는 혼인으로 사돈을 맺기에 걸맞은 동네다.
외가에는 방학 때나 정월 대보름에 들렀다. 설 명절에는 보름이 지날 때까지 세배드리러 오는 손님이 끊이지 않아서 엄마는 항상 정월 대보름이 되어서야 외가에 세배를 드리러 갔다. 대보름에는 이집 저집 다니며 오곡밥을 얻었다. 박 바가지에 받기도 하고 대나무 소쿠리에 받기도 하고. 큰 양푼이가 있지만 대보름 오곡밥 동냥은 그렇게 하는 거라면서 아이들은 모두 집집마다 대문간을 뛰어다니며 거지놀이를 하던 시절이었다.
새실은 그런 옛 전통 풍습이 남아 있었고 엄마는 참으로 옛날식이었다. 외사촌 언니가 두드러기가 났을 때는 이집 저집을 다니며 셋 집 초가 지붕에서 짚단을 뽑아다가 연기를 피웠다. 알몸으로 부엌 뒷문 밖에 서 있는 언니한테 그 연기를 씌워 올리며 두드러기를 치료한다고 하였다. 굵은 소금을 뿌리고 중얼중얼 주문을 외며 붉은 수숫대로 엮은 빗자루로 그 알몸을 쓸어올리거나 내렸다. 19세기에 태어나신 우리 증조할머니와 대화가 통하고 잘 지낸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게다.
네 칸으로 된 외가 위채 끄트머리에는 가방이다. 언제나 가장 어리고 젊은 사람들 차지였다. 막내 외삼촌이 결혼 전에는 아래채에서 올라와 그곳에서 지냈고, 부산에서 이모들 가족이 오면 역시 그 방 차지였다. 그 가방을 지날 때면 엄마는 어김없이 기척을 했다. ‘이 방이...’라며 말끝을 흐리기도 하고, 어떨 때는 ‘흑’ 하며 울음을 삼키기도 하고, 어떨 때는 ‘끙’ 앓는 소리를 내곤 했다. 세월이 흐르고 기억과 마음이 옅어지면서 그 소리도 차츰 사그라들고 사라졌다. 어릴 땐 그 몸짓이 무엇인지 몰랐으나 지금 생각하니 엄마가 전통혼례를 마치고 아버지랑 신혼 첫날밤을 지낸 방이었고 아버지와 첫 인연을 맺었던 곳이기에 그랬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새실과 한재 사이의 인연은 엄마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동네에서 학교도 못 다니는 가난한 집 어린 남자애 훈이를 한재 집에 데려다가 잔심부름도 시키며 같이 산 적도 있다. 일꾼들 따라 다니며 꼴도 베고, 소 풀도 먹이고, 군불도 지피고, 산토끼도 잡고, 대나무 낚싯대로 문저리 낚시도 하고... 이젠 그 아이도 작은 회사를 경영하는 어엿한 사장님이 되었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 소식에 엄마는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대견스러워했다. 엄마는 가족뿐 아니라 이웃도 외면하지 않는 따뜻한 마음이 가득한 분이셨다. 새실은 그런 곳이었다. 그런 마음을 품은 산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