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출산 후 나흘날, 시아버지 회갑연
양자 이름 하나에 기대어 살았다
"니는 할아부지 회갑년에 태어났응께 은주가 아니라 '갑주'다."
그렇다. 할아버지 생신, 그것도 육십 년 생을 한바퀴 채우고 기념하는 날 나흘 전에 내가 태어났다. 그해 태어난 자손은 갑주, 갑수, 갑년이라는 이름을 지어 어른 환갑을 기념하던 시절이었다.
할아버지 회갑 기념사진에는 추억 속 가족들이 즐비하게 가득 담겼다. 푸짐하게 차린 연회상을 앞에 두고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증조할머니와 우리 할머니와 고모할머니를 비롯해 작은집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앉으셨다. 뒷줄에는 초등학교쯤 다니는 언니와 오빠들이 섰고 작은집 아재와 고모, 큰아버지와 작은아버지, 우리 아버지, 고숙과 고모, 일가친척이 일부 모였다. 낯선 남자분들은 아마도 할머니 친정 조카이리라. 부산 검찰청에 있다면서 검은색 옷을 입고 줄줄이 명절에 인사를 오시곤 하였다. 그러니 아마도 선글라스와 검은 양복을 입은 하객은 그분들일 것이다. 그 뒤로는 열두 폭 병풍을 둘렀다.
엄마는 손위 동서 두 분과 나란히 왼쪽 끄트머리에 섰다. 큰어머니는 세 분 중에서 가장 안쪽 자리에서 두 돌 된 언니를 안고 계신다. 유채색 공단 저고리가 돋보인다. 작은어머니는 맨 끝에 작은집 언니를 안았다. 목사님 딸이자 유치원 교사답게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로 정갈하신 모습이다. 우리 엄마 새실댁은 두 동서 사이에 가장 큰 키로 자리 잡았다. 나를 이 땅에 떨구고 나흘째 되던 날이다. 그러니까 나는 할아버지 회갑 잔치 나흘 전에 태어났다. 이 오래된 흑백사진에도 엄마는 얼굴의 부기가 빠지지 않은 모습이 역력하다. 세 동서분이 나란히 담긴 사진은 이것이 유일해서 더욱 귀하다.
오른쪽으로는 어리고 젊은 아버지도 흰 두루마기를 입고 큰고숙, 큰아버지와 어깨를 나란히 한 줄로 섰다. 흰 두루마기는 아마도 할머니 솜씨로 지었을 것이다. 스물다섯 새신랑의 모습이다. 머리 모양은 기름을 잔뜩 바르고 위로 빗어 올린 상고머리 모양이다. 불룩하고 둥근 모양을 살려 키가 더 크게 보이게도 하고 머리숱이 풍성해 보이기도 한다. 그 당시 유행하던 머리 모양이리라. 아버지는 스물다섯. 지금 아버지 당신의 손자와 같은 나이다.
그날 자녀들 선물로는 와이셔츠가 준비되었다.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몫은 있어도 우리 아버지는 그 선물을 받지 못했다. 대학을 나오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바깥 행사 참석이 적어서일까. 결혼식 예단으로 맞춤한 셔츠가 있어서 그랬을까. 어른들이 마련하지 않은 그 와이셔츠 때문에 잔뜩 화가 난 아버지는 방에 들어와 방 벽지를 모두 찢어버렸다는 엄마의 전언이 있었다. 엄마가 기억하는 유일한 불화 장면이다.
우리 사촌 중 첫째는 단연 종손인 큰집 오라버니다. 할머니 뒤에 밀착하여 중심을 잡고 섰다. 첫째 언니는 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사이에 고운 원피스를 입고 꽃처럼 피어 있다. 한가운데 잔치의 주인이신 할아버지 품은 고종사촌 오빠가 차지했다. 반질반질 빛나는 이마와 초롱초롱 눈매가 또렷하다. 어릴 때부터 외가에서 자라 어른들 사랑을 듬뿍 받았던 오빠다. 딸인 나보다도 먼저 우리 엄마 품을 차지했던 오빠. 다섯 살 위인 오빠가 축담에 서서 마당을 향해 긴 오줌발을 날릴 때면 나는 곧잘 따라서 했다. 오줌을 서서 누다가 무참히 흘러내리는 오줌발에 실망하며 엄마한테 잊히지 않는 질문을 던졌다.
“엄마, 나도 오빠처럼 크모 멀리 오줌 눌 수 있제, 응? 응?”
엄마는 대답이 없었다. 돌아앉아 가방에 딸린 아궁이에 부지깽이로 불씨를 살리면서 묵묵부답이었다. 그 표정의 이유는 도무지 알 수 가 없었다. 어린 나는 몇 번이나 되묻기를 반복하며 채근했다. 딸의 질문 공세에 밀려 겨우 한숨 섞인 웅얼거리는 발음으로 ‘으응, 그래.’라며 어정쩡하게 답하고는 무언가를 꿀꺽 삼켰다. 얼굴은 보이지도 않고 돌아앉아 미동도 없이 힘없는 소리만 새어 나왔다. 어깨를 웅크리고 벌겋게 타오르는 아궁이 불꽃만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 짧은 찰나의 엄마. 그 모습은 어쩐지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다. 그 장면은 이후 한동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남아 긴 세월 동안 나에게 수없이 많은 질문을 반복해서 다시 던지곤 했다.
세 살배기 꼬맹이가 그 말만 하고 말았겠는가. 세 살은 호기심 많고 상상이 하늘 끝 간 데를 모르는 나이다. 엄마의 어두운 낯빛을 밝게 바꾸려고 희망의 문을 두드리며 한마디 더 보탰다.
“나도 크모 오빠맨키로 꼬치가 길어질 거제?”
“...열심히 기다리 봐라. 길어질랑가.”
피식, 체념 섞인 냉소로 혼자 구시렁거리는 엄마 독백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깊은 우물에 빠진 고양이가 희망으로 찬란히 빛나며 드리우는 외줄기 새끼줄을 놓칠 수 없다. 고양이가 쨍한 햇살에 말리는 광주리 위 생선을 낚아채듯 잽싸게 귀에 담아서는 열심히 실천에 옮겼다.
하루는 고마리(허리춤)에 손을 넣고 만지작거리는 나를 발견하고는 엄마가 화들짝 놀라셨다. 무슨 상황인지 눈치챈 엄마는 깜짝 놀라며 방긋 웃었다가 순식간에 무겁고 어두운 표정을 짓다가 돌연 빙긋이 웃었다가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빨리 돌아가는 영화 장면처럼 낯빛을 요리조리 바꾸어 보이다가 정색을 하며 진지하게 내게 일렀다. 강아지가 고양이가 될 수 없고, 송아지가 내 진짜 사람 동생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나는 오빠 몸처럼 되지 못한다는 선언이었다.
어른들이 예뻐하는 그것, 엄마의 어두운 표정을 해님처럼 환하게 웃게 만드는 그것이 나는 될 수 없다는 폭탄선언이었다. 할머니들이 그렇게 예뻐하는 오빠처럼 나는 되지 못한다고 어린 가슴에 대못을 박는 말이었다. 나는 그때 느낀 절망과 좌절의 늪에서 수십 년 동안 허우적거렸고 엄마는 변덕스럽게 빨리 돌아가는 그 활동사진처럼 불안한 마음을 안고 살았다.
“남의 신랑이 그리키나 부러벘시모 버얼써 어디로 살로 갔을 끼다.”
남의 아들을 훔쳐오고 싶을 정도로 부러웠다는 후일담은 한평생 끊이지 않고 들었다. 엄마의 깊은 속마음이었고 한 맺힌 넋두리였다. 그런 마음을 읽으셨는지 할아버지는 나보다 한 살 어린 사촌 남동생을 엄마 앞으로 양자로 올렸다. 전통 관습대로 대를 잇기 위해 그랬을 수도 있고, 속되게는 집안 재산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양자제도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큰집 오라버니 군대 갈 무렵 감행한 양자 입적은 그렇게 진행되었다. 그 이전부터 양자라는 말씀은 미리 해두셨지만 본격적인 진행은 그랬다. 그리하여 엄마한테도 가슴으로 낳은 아들이 생겼다. 시집에서 제자리를 지키며 뿌리를 깊이 내리고 살만한 든든한 이유 하나가 생긴 것이다.
회갑연이 무엇인가. 육십갑자를 한 바퀴 돌고 지나온 세월에 쉼표를 찍는 날이 아닐까 싶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고 감사의 인사를 올리는 날. 연회의 주인공인 할아버지가 여전히 건재하심을 증명하고, 그 자녀들이 한자리에 모여 장수하시기를 기원하며 감사와 축하의 말씀을 드리는 날. 인생의 과거, 현재, 미래를 확인하는 의식일 것이다. 그러면서 다음 세대가 든든히 무럭무럭 자라고 있음도 확인하는 자리. 할아버지가 큰 마당에 가득 찬 후손들을 보며 흐뭇해하셨듯이 엄마도 양자라는 이름 하나에 기대어 외롭고 불안한 여생을 붙들고 살았으리라. 회갑연 사진 한 장이 놋주발보다 더 쨍쨍하게 가슴을 울리고 저미는 이유다.
Brunch Book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