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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섯손가락 Apr 23. 2024

겨울을 지나가다(조해진)

겨울을 지나 봄으로 가는 정미 칼국수

이별은 슬프고 아프다. 모든 이별이 그렇다. 연인과의 이별, 친구와 절연, 졸업, 중년의 자녀들이 겪는 부모와 이별 또한 마찬가지다. 천 년 만 년 헤어지지 않고 평생을 함께 살 듯이, 영원히 살 것만 같았던 부모, 이별을 상상도 하지 못하던 엄마. 태어나서 처음이면서 마지막인 단 한 번의 엄마와 사별. 하늘이 무너지는 고통을 조해진은 <겨울이 지나가다>로 이름 지었다. 


조해진의 소설은 이번이 처음이다. 젊은 작가답게 문장이 신선하다. 제목부터가 다르다. 비유적이면서 주어와 서술어만 쓰인 짧은 문장 형식이다. 글에서도 통속적인 문장은 드물었다. 작가만의 감각으로 직조한 독창적인 문장이 곳곳에서 눈을 번쩍 떠 세상을 새로이 읽게 한다. 이럴 때 눈에서 비늘이 뚝뚝 떨어진다고 하던가. 


-사람의 몸은 시간이 담긴 그릇 같다

-눈물의 감촉은 따뜻했다. 배신감이 느껴질 정도의 온기였다. 삼 일은 길고도 짧게 지나갔다. 

-J읍은 어디에 서 있든 산의 실루엣이 보였고 주변에 호수와 천이 있어서인지 안개가 자주 꼈다. 오늘도 안개는 짙었고 안개를 흡수한 어둠은 우주의 한 조각인 양 무겁고 적요했다. 

-내 몸에서는 엄마의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엄마는 보이지도 않았고 만져지지도 않았지만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엄마에게 보호받는 느낌을 받았고, 때로는 눈앞에 엄마가 있다는 듯 허공에 대고 어리광을 부리고도 싶었다.

-집으로 걸어가는데 바람 끝에 둥글고 나른한 온기가 배어 있는 게 느껴지긴 했다. 겨울에서 봄 사이의 국경을 지나가는 기차 안의 승객이 된 것만 같았다. 기차는 느리게, 그러나 쉬는 일 없이 규칙적으로 달릴 것이고 겨울 나무와 봄 나무가 섞여 있는 기차 창밖을 바라보다가 문득 주머니 안을 뒤적이면..  


전체 이야기는 세 개의 장이다. 입동, 대한, 우수. 겨울이 시작되는 절기, 입동으로 시작한다. 그건 마치 엄마와 사별의 아픔이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입동으로 전해지는 듯하다. 그 아픔이 극한에 이르는 시점은 대한일 것이다. 일 년 중 가장 추운 날. 영하 18도를 기록하여 온 마을이 평소보다 헐거워진 느낌이 드는 절정이다.

마지막은 봄을 맞이하는 우수다. 생명을 깨우고 자라게 하는 비가 내리는 우수. 슬픔이 결핍된 계절로 접어들며 끝난다. 세 개의 장은 각각 6개, 6개, 5개의 단락장으로 엮었다. 마지막은 작가가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로 하나를 더 더한 셈이다. 그러면 6, 6, 6이 된다. 


엄마는 J읍에서 십여 년 전부터 칼국수 가게를 했다. ‘정미 칼국수’다. ‘정미’는 키우는 개 이름이다. 큰딸 정연과 작은딸 미연의 첫 음절을 따와서 ‘정미’가 되었다. 그건 마치 두 딸을 대신하는 듯도 하고, 비록 개이지만 딸처럼 동급으로 대하며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담겨 있기도 하다. 어쩌면 이름을 그렇게 지은 엄마는 정미를 통해 두 딸을 이 세상에 당부하려는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애완견 이름과 칼국수집 간판으로 확연히 새긴 것이다. 


‘칼국수’라는 소재는 어쩐지 낯설지 않다. 국민 애호 메뉴이기도 하지만 독자는 여기서 김애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가 쓴 ‘칼자국’이라는 소설이 있기에 그렇다. 역시 칼국수집이다. 혼자된 엄마들이 흔히 개업하는 가게는 칼국수인가 싶다가도 소설이 대박을 치려면 ‘칼’이 들어가야 하나 싶기도 하다. 그러면 다음엔 칼국수집을 하는 엄마의 손에 난 칼자국이나 칼 흉터를 소재로 끌고 와야 할까 싶다. 읽는 내내 칼국수와 칼자국이 자매 같은 느낌이었다. 


나의 엄마도 칼자루를 쥐고 음식을 많이 만들었다. 혼자서 요리하기 바쁠 때면 언제난 손가락에 상처를 냈다. 그놈의 칼이 제 마음대로 춤을 추는 것이다. 노안이 그렇게 허용했는지, 둔감해진 손이 정확한 박자를 놓쳐버렸는지 모르겠지만 그 칼이 스친 상처는 언제나 아렸다. 


‘겨울은 지나간다’에는 간단하면서도 다양한 인물이 스친다. 가장 가까이 지냈던 란 미용실 이모, 발음이 동글한 언어를 나누는 모자 손님, 정미가 살 집을 맞춤한 목공소 영준 씨. 영준은 주택공사 직원이면서 이곳에서 목공일을 한다. 정미 칼국수집에서 칼국수를 먹으며 엄마를 알고 나중에는 정연과 가까워진다. 영준은 정연처럼 죽음을 목격한 동지다. 재개발이나 도시정비사업으로 철거대상인 집을 방문하여 보상처리와 상담을 하는 일을 한다. 


마지막까지 버티며 남은 집은 언제나 경제적으로 열악하다. 기초생활수급자이거나 비숫한 환경이다. 다현이도 그랬다. 부모 없이 외할머니와 단둘이 살다가 작년에 할머니마저 돌아가시고 외톨이가 된 다현이. 가족이라곤 할머니뿐이었던 스물세 살 청년은 갈 곳이 없다. 애견미용 자격증도 있지만 일과 연결되기는 여의치 않다. 가난은 고독의 충분조건이 된다. 고작 주택공사 직원인 영준에게 마음으로 기대었던 짧은 시간이 있을 뿐 그녀를 붙잡을 것이 이 세상에는 하나도 없었나 보다. 


영준과 정연 사이에는 정미 칼국수집 엄마와 다현이의 죽음이 있다. 서로가 맞이하는 슬픔과 나누는 위로가 ‘슬픔이 만들어지는 계절을 지나가면서 슬픔으로 짜여졌지만 그 슬픔이 결핍된 옷’을 입게 한다. 입동에서 대한을 거쳐 점차 바람끝이 둥글어지는 우수를 맞이하며 정미 칼국수로 간다. 이제는 정연의 칼국수로 ‘건강한 더운 기운’과 ‘담백한 포만감’을 채운다. 


엄마와 사별한 슬픈 이야기지만 그 슬픔을 다루는 기교가 예사롭지 않다. 그 감정의 흐름을 입동, 대한, 우수로 대변하고 슬픔의 극한을 얼어붙은 대한으로 대체한다. 모든 것은 잊힌다는 엄마 말씀을 상기하며 이 순간 겪는 슬픔도 잊힐 것이라고 암시한다. 독자마저 안심시키며 삶의 고비를 넘기는 지혜로운 해법 하나까지 챙겨준다. 그러면서 이십대 청년의 가슴 아픈 죽음으로 엄마 죽음을 한결 여유롭게 하고 이 시대 사회적 아픔까지도 드러낸다. 작품 속 강렬한 우울과 아픔으로 독자를 계속 힘들게 하지 않고 마지막에는 영준과 정연의 칼국수 식사로 훈훈한 봄바람까지 안겨주는 따듯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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