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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섯손가락 Apr 24. 2024

1-8. 고마 그리 살아라

소오산처럼 그 자리에

외가는 새실이다. 금오산을 사이에 두고 앞으로는 한재가 있고 뒤로는 새실이 있다. 어릴 적, 그러니까 서너 살쯤 외가에 갔을 때다. 아침에 일어나니 동네 앞에 희미한 산이 우뚝 솟아 있음을 발견하고는 의아하게 물었다.


“오빠야, 저 앞에 있는 게 뭐꼬?”

“저건 금오산이다.”


외사촌 오빠가 세상 물정과 이치를 다 아는 사람처럼 대답했다.


“아. 소오산? 저게 소오산이라꼬?”

“그래. 소오산이라고도 하제.”

“근데 소오산은 집 뒤에 있는데 와 앞에 와 있노?”

“아이구 바보야. 여기는 새실잉께 그렇지. 너그 집은 한재 아이가. 저 산 앞에 있고.”


그 공간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에는 이후 한참 시간이 걸렸다. 외가를 수없이 다녀보고서야 그 위치의 차이를 깨쳤다. 그 큰 산을 누가 앞으로 옮겨 놓은 것도 아니고 밤새 스스로 움직인 것도 아니고 산은 늘 그 자리에 있으며 앞뒤로 한재와 새실이 고정되어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데에 몇 년의 발걸음이 필요했다. 그만큼 내가 어리고 어린 시절의 이야기다. 


첩첩산중 깊은 골짝에 있는 외가를 다녀오면 할아버지는 빠짐없이 물으셨다.


“그래. 새실은 집이 몇 채나 있더노?”


평소 말씀이 없으신 할아버지가 그럴 때는 싱긋싱긋 미소를 지으시며 물으셨다. 며칠 지내다가 온 며느리와 손녀가 반갑기도 하고 작은 마을에서 큰 동네로 시집온 막내며느리가 들으라는 듯이 꼭 그런 인사를 건네셨다. 며느리한테 잘 다녀왔냐고 직접 세세히 물으시는 것을 대신하는 인사법이기도 했다. 어린 손녀를 두고 며느리를 대신하여 장난을 치신 게다.


“작년에는 열여섯 집이었는데 이번에는 강께 열다섯 집이던데예.”


양손 열 손가락을 접으며 또박또박 정확하게 보고하는 것이 내 임무였다. 마치 외가 방문한 대가로 보고 과제를 하듯이. 그 열다섯 집에는 누구누구가 사는지, 뭘 하는지, 식구가 몇 명인지, 친구 누구랑 뭘 하며 놀았는지... 마을에서 보고 들은 바를 모조리 읊어내는 게 어린 손녀로서 역할이었다.


해마다 집이 줄어들고 도시로 떠나는 이들이 늘었다. 그래도 동네 한가운데를 지키는 외가가 있고 길 아래에는 가실 아재집이 있었다. 동네를 들어서면 맨 처음 만나는 첫 집이고 자잘한 대나무로 엮은 울타리가 깔끔했고 작은 대숲을 두른 집이다. 엄마는 삼종 오빠라고 했다. 그러니까 엄마한테는 팔촌이고 나한테는 외가로 구촌 아재가 된다. 키가 자그마하면서도 꼿꼿한 자세를 잃지 않고 걸음걸이가 다부진 분이셨다.


햇살이 쨍한 초여름 아침, 하루는 외가로 올라오셨다. 


“정실아, 내 이번에 서울 갔다 왔는데 세상이 참으로 많이 달라졌더라.”

“무슨 일로 갔십니꺼?”

“우리 작은 놈 일이 좀 있어서 서울 법원까지 갔다 안 왔나.”

“그러모 일은 잘 됐심꺼?”

“응, 우리 아들은 잘못 했응께 고개를 들지도 말고 푹 수그리고 있어라 안 했나. 그란데 그 많은 남자들이 여자 판사가 높은 자리에서 큰소리 한번 땅땅 친께 꼼짝 못하더라. 요새는 그런 세상이더라.”

“...그렇던가예?”

“응, 그란께 니도 딸래미라도 잘 키우고 살모 괜찮을끼다. 고마 그리 살아라.”


엄마가 스물다섯에 혼자 되고도 시집을 떠나지 않았던 첫 시작이 이 대화에서다. 삼종 오빠, 가실 아재의 말씀 한마디에 어지럽던 마음이 살폿 내려앉았다. 거기다가 외할머니도 한술 뜨셨다.


“그 점잖은 어른을 우리가 우찌 배신할끼고. 고마 그리 살아라.”

“......”

“인생 별거 없다. 딸은 고등핵교나 졸업시키서 시집 보내모 된다. 친정에서 살림 많이 가져가도 기 편다고 말이 많을끼고. 적당히 해서 보내모 된다.”


자녀 열을 낳고 사신 외할머니가 깨친 인생철학이 내린 결론이다. ‘고마 그리 살아라!’


까마득한 반세기 전의 일이다. 이날을 두고 엄마는 두고두고 말씀하셨다. 기운이 팔팔하고 가슴 가득 희망을 품고 살던 시절에는 그날 아침을 긍정하고 감사히 기억했다. 


“그때 그 삼종 오빠가 날 붙들었다아이가. 참 고맙제.”


가득 찼던 꿈이 모래알처럼 술술 빠지면서 그 기억 속 말씀도 점점 빛을 잃고 흐려졌다. 


“쳇. 사고쳤다 안 하고 일냈다카네...”

“너그 할무이가 그 말도 시키서 그랬을끼다...”

“그 꽃다운 어린 아아를 그리 엄한 층층시하 시집살이를 시키고...”


세월 따라 엄마의 기억과 해석은 그렇게 달라졌다. 


엄마의 선택을 두고 세상 사람들은 외가가 어딘지, 외가 어른들이 어떤 분인지 궁금하다거나 대단하다고 했다. 또 조금 젊은 세대는 문화적 살인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엄마한테 잘해야겠다고 다짐을 두는 친구도 많았다. 어쨌거나 엄마는 외할머니가 말씀하신 ‘의리’도 지키고 예를 다하며 살았다. 그야말로 지아비 없이 청춘에 시집살이를 지속한 사연에 그날이 있었다. 어린 나한테는 이렇게 못을 박았다.


“그날부터 엄마는 내 인생은 포기하고 니 하나만 보고 살았응께 그리 알고 잘 살아야 헌다!”


소오산을 누가 옮기지도 않고, 스스로 움직이지도 못한 것처럼, 엄마는 그 자리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지키며 살았다. 고마 그리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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