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 결혼식 VS 수술;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여름과 가을이 번갈아가며 널뛰기를 해 대는 9월의 끝자락에 만난 95세 할아버지는 입원하기 직전까지 운전도 하시고(*1). 보행할 때도 지팡이(*2) 밖에 안 쓰시는, 가족/친구들과 여가 생활도 즐기시던 귀염쟁이셨다. 얼굴만 보면 절대 95세인 줄 모를 것 같은, 살짝 천진난만한 미소가 사르르 깔려있는 이 할아버지는 심장 판막이 헐거워지면서 급성 심부전 증상으로 오셨다.
아니, 아침에 일어났는데 숨을 쉴 수가 없는 거야!!!
지난주에 내가 응급실 의사로 일할 때 입원시킨 분이라 완화의학을 하면서 병동에서 보니 어찌나 반갑던지! 나는 이렇게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환자분들을 만날 수 있는 지금의 직장이 참 좋다. 응급실에서 뵀을 때 따님 2분이랑 손자 손녀등 가족들이 방 한가득 메우고 있어서 아 복작복작 보기 좋네 싶었는데 역시나 오늘도 따님이 바로 옆에 앉아 계신다.
" 할아버지, 잘 지내셨어요? 숨 쉬는 건 좀 어떠세요? 그때 다리 아프시다던 건 좀 괜찮나요?
이야기를 이어가며 할아버지에 대해 조금씩 더 알아간다. 할아버지는 심장내과로부터 TAVR(경피적 대동맥판막삽입술- 가슴을 열 필요 없이 허벅지나 손목 동맥을 통해 카테터를 이용하여 새로운 인공 판막을 삽입하는 시술) 권유를 받은 상황이셨다.
완화의학에서 늘 하는 key question 핵심 질문들이 있다.
What Matters Most? 지금 뭐가 제일 중요하세요?
이런 걸 물어보면 의외의 대답이 툭툭 튀어나오곤 하는데 이 귀염둥이 할아버지께서는
응? 우리 손자 결혼식이 11월 22일인데, 나 거기에 꼭 참석하고 싶어~
아니, 이렇게 중요한 정보를! 내가 묻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나!!
" 아, 그러세요~"
" 그래~ 빨리 수술받고 건강해져야지~ 이 놈의 심장이 말을 안 들어서 여러 가지 문제가 다 생기잖아~ "
순간 나는 극강 T의 문제 해결 본능을 발휘해서,
" 아니, 할아버지. 결혼식 참석이 목적이면 제 생각엔 수술을 결혼식 뒤로 늦추는 게 어떨까요? 모든 시술에는 리스크가 있잖아요. 만약 수술 중에 뭐가 잘못되면… 오히려 더 안 좋아지실 수도 있어요. 일단 결혼식에 다녀오시고 그다음에 수술하시는 게 나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제 두 달밖에 안 남았잖아요"
그런데....
내 말을 듣고 계시는 할아버지의 표정이 점점 오묘해지신다.
"아니, 시술을 받아야 내가 다시 힘을 내서 옛날처럼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할 것 아니여..."
순간 아차~ 싶었다.
" 아, 그렇죠. 그런데 이게 또 아주 리스크가 없는 시술은 아니니, 일단 차도를 보면서 심장내과랑 조금 더 상의해 보시는 게 좋겠어요".
대화가 끝날 즈음 거진 한 세기를 살아온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인생을 소탈하고 행복하게 살아오신 자만이 가지는 여유가 배어나서 슬쩍 여쭤봤다.
" 할아버지, 은퇴하시기 전에 뭐 하셨어요? "
" 나? 배관공. 평생 일해서 키운 내 사업은 은퇴하면서 같이 일하던 내 조수한테 팔았지~ 허허. 우리 딸이 그 사무실에서 아직도 일해~"
정말 잘 어울렸다. 넉살 좋고 손재주도 좋아 인생을 재미나게 사셨을 이 이태리 할아버지의 인생이 촤르르 내 눈앞에 영화처럼 지나가는 것 같았다.
오늘 살짝 시간이 남길래 할아버지 병실을 다시 한번 들러 보았다.
"아, 나 내일 퇴원한다는데~ 그런데 내가 질문이 하나 있는데... "
분위기가 갑자기 심각해진다.
" 선. 생. 님, 솔~직하게 말해주셔야 합니다. 내가 이 수술을 받아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
아, 그것 때문에 할아버지 고민 많이 하셨구나... 어제 할아버지랑 면담 끝난 후 내과팀, 심장내과팀 등이랑 얘기를 좀 해 봤는데 다들 심장내과가 괜찮다고 하면 해도 되지 않겠냐...로 의견이 모아진 터라 단호박처럼
심장내과에서 할 수 있다고 하면 하세요!
할아버지 얼굴에 다시금 미소가 사르르 퍼진다.
11월 22일, 그날은 내 언니의 생일이기도 하다.
나는 그날까지 매일 할아버지를 위해 기도하려 한다.
결혼식에 건강히 참석하실 뿐 아니라, 이후로도 오래오래 증손주까지 품에 안으실 수 있도록.
그 삶의 날들이 더 넉넉히 허락되기를.
1) 자동차의 나라 미쿡에서는 운전이 삶의 질을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기능이다. 노년에도 운전을 계속할 수 있다는 건 독립성과 자유의 상징이기도 하다. 운전하지 않으면 동네 슈퍼마켓도 갈 수 없는 남부 애틀란타에서 고령의 할머니가 자꾸 사고를 내서 아들이 운전기사님을 붙여 둘 사이에 피어나는 노년의 우정을 그린 Driving Miss Daisy라는 영화도 있지 않는가
2) 거동이 불편해질수록 지팡이> 보행기 > 1 person assistance 사람 1명 필요> 2 persons assistance 사람 2명 필요> 휠체어의 순서로 도움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