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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로운 뉴욕의사 Jul 12. 2020

나는야 펠로우.

8년간의 응급의학과 교수생활을 뒤로하고 다시 수련에 들어간 뉴욕의사.

그동안 뉴욕 코로나 후속 편을 기다리신 여러분! 

오늘은 잠깐 쉬어갈 겸, 좀 다른 얘기를 해 볼까 해요. 


제가 그간 8년 간의 응급의학과 교수 생활을 마치고 7월 1일 부로 호스피스 완화의학 펠로우를 시작하였습니다. 


   뭐 그저 쉬울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아, 정말 나이 들어서 새로 무언가를 배우려니 쉽지가 않아요...

배움에도 다 때가 있다던 옛 어르신들의 말은 틀린 거 하나도 없어요... 


    우선 전자 의무 기록 시스템이 완전 다른 시스템이라 그거 배우느라 노트 쓰고 오더 넣는데 엉금엉금 기어가는 거북이처럼 시간이 백만 년 걸립니다. 아, 예전에 빛의 속도로 차팅하며 레지던트보다 더 빨리 오더 넣던 샤프한 응급의학과 교수는 사라지고 엉금엉금 이 버튼 저 버튼 누르다 결국 엉뚱한 오더 넣고 뚱한 표정으로 "저기.. 있잖아...." 하면서 어쩔 줄 몰라하는 펠로우가 되었어요... 우어어어.... 자리도 입구 맨 앞이라 다른 애들 일 끝나고 가면서 아직도 일하고 있는 저한테 "너 오늘 당직이야?" 하면서 안녕~ 하고 인사하고 가는.... 엉엉엉.. 나 당직 아니거든.... -_-;;;


    그리고 병동, 외래, 가족회의 등등 응급의학과에서는 전혀 경험할 일이 없었던 환경에서 일하게 되면서 다른 내과/소아과 출신 친구들은 당연하게 여기는 개념들이 탑재가 안 되어 있어서 시스템을 이해하는데 시간이 두배로 걸립니다. 그리고 첫날 호출기(삐삐)를 받았는데, 아, 적응 안 돼요.... 내가 맨날 호출하던 자리에서 호출당하는 자리로 가니, 신기하기도 하면서 응급의학과 시절에는 잘 이해 안 되던 컨설턴트들의 마음이 슬며시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ㅎㅎ  병원 자체 메시징 시스템이 있어서 대부분이 문자로 해결하긴 하지만 가끔 띠띠띠띠 하고 호출이 올 때면... 아오..... 


  그리고 저희 병원은 암병원이다 보니 마약성 진통제를 많이 쓰게 되는데, 응급의학과 시절에는 잘 쓰지 않던 약을 쓰기도 하고, 주는 방법이나 용량이 달라서 더 조심스러워집니다.  가끔은 야.. 내가 펜타닐(진통제 종류 중 하나) 100 mcq 이하로 준 적이 잘 없는데 지금 50 가지고 너 이러는 거니... 뭐 이런 마음이 들 때도 있어요 ㅎㅎㅎㅎ


   이제 딱 일주일 됐는데, 

처음 며칠은 긴장하고 일 속도가 늦어서 밥도 잘 못 먹고 하다 보니 온 몸에 알레르기가 잔뜩 돋기도 했으나, 

주말이 되니 이것저것 많이 나아졌어요. 


    나이가 들어서 다시 트레이닝을 받고, 원래 익숙하던 환경과 전혀 반대되는 환경에서 일하게 되면서 깨달은 점들이 몇 개가 있는데, 


1. 휴일이 이렇게 소중한 줄 몰랐습니다.

응급의학과 교수 시절에는 오프가 많아서 평일에도 여유가 많아서 휴일이면 되려 사람들이 밖에 너무 많아서 싫어했는데, 이제는 롱 위켄드(휴일 붙은 긴 주말)를 손꼽아 기다립니다. 근무 시간이 다른 사람들과 비슷해지면서 훨씬 공감대가 많이 생기니 새롭네요 :)  

 

2. 수련의들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교수 입장에 서 있을 때는, 레지던트들이 질문 안 하면 배우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 같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왜 모르는지 이해가 안 되는 적이 많았는데(개구리 올챙이 시절 망각한 거죠 ㅎㅎㅎ), 제가 다시 전혀 낯선 분야에 수련의로 딱 떨어지니 완~~ 전 공감됩니다. 우리 레지던트들, 다시 만나면 정말 잘해 주고, 친절하게 처음부터 하나하나 다 설명해주고, 한 번에 못 알아 들어도 세 번 네 번 설명해 줄게. 모른다고 싸~한 표정 안 짓을께! 약속해!! ㅋㅋㅋㅋ


3. 시간의 소중함을 알았습니다.

 교수 시절에는 미국 의사 설명회 할 때 대표로 워라벨 강의도 할 정도로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이제 개인 시간이 확 줄어들면서 정말 중요한 일만 하고 중요한 사람들만 만나게 되었습니다. 뭐랄까... 삶이 간결해져서 다이어트한 느낌? 인생이 무한할 것만 같이 살던 철없던 제가 날을 계수하게 된 것은 정말 좋은 변화입니다.   



 뭐 이렇게 말하지만 아직도 옛날 모습이 많이 남아있죠. 어제는 컨설트 전화해서 횡설수설 질문의 의도가 파악이 안 되는 질문을 하는 인턴에게 잠시 펠로우 신분을 망각하고 기함을 토하는 저를 보고 같이 일하는 동료가 막 웃으면서 "야, 너 딱 응급의학과 교수다ㅋㅋㅋㅋ" 이런 건 안 비밀?!? ㅎㅎㅎ



 아무튼 저는 하루하루 배우는 재미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나이가 들어서 준비가 되었을 때, 이렇게 좋은 병원에서 배움의 기회를 갖게 된 것은 정말 행운이에요. 한글 야학 다니는 어르신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하면서 하루하루 저는 재미있게 다니고 있답니다. 우리 교수님은 무슨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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