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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로운 뉴욕의사 Jul 20. 2020

나는야 펠로우 II

나는 왜 멀쩡한 꿀직장을 제 발로 걷어차고 다시 배움의 길로 들어섰는가.

지난주의 열화와 같은 성원과 함께 들어온 질문들, "왜 그랬어?"에 대한 대답을 오늘은 한 번 해볼까 해요.


저는 원래 재난의학 전문가가 되려고 미국에서 응급의학 수련을 받았답니다.

원래 본 3 때 외과, 산부인과, 응급의학과, 정신과의 네 과를 염두에 놓고 실습을 시작했는데,


외과는 실습을 돌아보니 관심 가는 수술이 맹장수술, 복강경 담낭절제술 같이 짧고 간단한 수술에만 관심이 가는 것을 보고 '아, 이건 아니구나...' 하고 알았죠?


산부인과는 산과가 정말 재미있었어요, 수술도 재미있고 외래진료도 재미있었고, 그중에서도 고위험 임신(MFM)이나 REI(쉽게 말해 인공수정하는 과)에 특히 관심이 있었는데, 진로를 생각하면서 미국에 갈 마음이 있었던 터라, 훌륭한 산부인과 의사가 되려면 갓 졸업한 외국 의대 출신으로 고생하며 미국에서 수련받는 것보다 그냥 한국에 남아서 좋은 병원에서 수련받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어요. 지금도 가끔 산부인과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죠 ㅎㅎ


응급의학과는 학생 때 2주를 돌았는데, 끝나고 나니 무슨 시장바닥 같은 것이 정신이 없어서 '아, 나는 이건 절대 안 해야겠다'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때 기생충 교수님께서 지나가시면서 "뭐든지 절대 안 한다고 하는 건 꼭 그걸 하게 되지..."라고 뜬금없이 던지고 가셨죠. 그때는 별생각 없었는데 지나고 나니 정말로 그렇게 되었어요!!! 하하하


그리고 정신과는.... 4주 간의 실습 동안 저에게 맡겨진 환자분이 우울증으로 말을 정말 한 마디도 안 하시는 바람에... 아... 이건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과가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제가 응급의학과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본과 3학년 때 응급의학과 수업을 듣는데, 그때 담당 교수님께서 아주 잠깐 재난의학 이란 과목을 소개하고 지나가셨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어! 나 저거 진짜 잘할 수 있는데!!!'라는 생각이 버번쩍 들면서 '난 저걸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죠.


원래 위기 상황에서 퍼포먼스가 뛰어난 편인 걸 알고 있었고,

그때는 한국 의대의 막강 커리큘럼-요즘은 좀 달라졌는지 모르지만 제가 다닐 때는 월~금 아침 8시부터 5시까지 수업하고 주말에 시험 보고 다시 월요일부터 또 다른 과목 그렇게 시작하고 했었음. 50분 수업에 슬라이드 200장 들고 오는 분도 있었고. 그러면 배운 거 복습은 언제 하며 잠은 언제 자고 친구는 언제 만나나...? -에 찌들고 찌든 자라는 꿈나무라 좀 다른 세상을 보고 싶었으며,

I want to see the world! 뭐 이런 눈빛으로 반짝이며  

책 읽다 교차 지원해서 온 문과 출신이라 의대생 치고는 지나치게 많은 인문사회에 관한 호기심이 의학과 접목이 되는 최적의 과목이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리고 이런 재난 의학을 하려면 미국에서 응급의학과 수련을 받는 것이 가장 적합한 수련이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졸업 후 살짝 고민을 하다가 그 당시에 기회비용 대비 리턴이 더 크다고 생각되는 선택을 했고, 잘 풀려서 미국에서 응급의학과 수련을 받게 되었죠. 그런데 재난 의학은 레지던시 중에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펠로우쉽을 해야 이제 뭘 좀 배울 수가 있는데, 레지던트 말년 차 펠로우 인터뷰를 막 시작하던 시절, 같이 펠로쉽 인터뷰를 하던 캐나다 국적 친구에게서 제가 있던 응급의학과는 펠로우라도 임상을 볼 때 누군가의 감독을 받고 보는 것이 아니라 어텐딩으로 독자적으로 보기 때문에 제가 갖고 있던 수련 비자로는 펠로우를 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재난 의학은 국가 안보와 밀접하게 연결이 되어 있어서 제가 관심이 있던 프로그램들은 저 같은 외국인은 본인의 역량 여부를 떠나서 절차적으로 들어가기가 좀 힘든 상황이었어요. 그 당시에는 어린 나이에 혼자 생외국 출신으로 미국 애들 틈새에서 레지던시 하느라 너무 지쳐 있어서 '아이고 그러면 좀 쉬었다 하지 뭐' 하면서 펠로쉽 인터뷰를 접고 잡 인터뷰로 방향 전환을 했기 때문에 이 카더라설은 끝까지 확인을 해 보지 않아서 사실 여부는 저도 알 수가 없답니다 ㅎㅎ.


 그렇게 어텐딩 잡을 잡고 영주권을 받기 위해 일을 하면서 이래저래 생각보다 시간이 길어졌고, 그러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되었답니다. 수많은 생각이 있었지만 한 줄로 요약해 보자면, 재난 의학은 실제로 재난을 해결한다기보다는 많은 부분이 대비 과정이고, 그러면서 정치력이 너무나도 중요한 분야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이 얘기를 듣고 뭐, 당연한 거 아냐? 재난의학 하고 싶다면서 왜 그걸 몰랐어?라고 하실 분들도 있겠지만... 25세의 저는 몰랐습니다 ㅎㅎ 그리고 그 생각은 이번 코로나 사태를 지나면서 틀리지 않았음이 확인되었죠 :)


그리고 미국 탑 5 안에 드는 대량 볼륨의 레벨 1 외상 센터에서 수련을 받고 그 언저리에서 어텐딩을 하면서 일상생활에 일어나는 재난을 너무 많이 봐서 그런지.... 뭔가 어디 이름도 잘 들어보지 못한 곳에 가서 너무나도 엄청난 일을 당해 생활터전이 뿌리 뽑힌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도 중요하지만, 좀 더 일상생활에서 일어날 법한 일들에서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답니다. 그러면서 완화의학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생겼죠. 응급의학과를 하게 되면 다양한 종류의 죽음들을 많이 접하게 되는데 과의 특성상 주로 비명횡사를 많이 접하게 되거든요? 그리고 그렇게 가고 나서 남겨진 흔적들을 보면서 인생에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자연스레 많이 하게 되어요. 그래서 죽음을 좀 더 구체적으로 공부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답니다. 죽음은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맞이하게 되는 피할 수 없는 문이니까요.


 그리고 원래 생각하던 목적지에 가지 않고 중간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목적지에 더 이상 가고 싶지 않아 졌기  때문에, 뭔가를 더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마음은 항상 갖고 있었어요. 하지만 당시에 살고 있던 삶이 시간적 여유도 많고 너무나도 편한 삶이었기 때문에 미적미적하다가 작년 중반부터 지금 하지 않으면 평생 하지 않을 것 같았고, 그러면 10년쯤 있다 돌아봤을 때 후회가 남을 것 같아서, 마지막 힘을 짜내어 서류 준비를 하고 인터뷰를 해서 제일가고 싶던 지금 일하는 프로그램에서 일하게 되었죠.  


 그래서 저보다 11살 어린 동료 펠로우와 같은 팀에서 일하면서 다시 수련을 받게 되었답니다.

평생 안 해 보던 회진과 당직에, 환자 프레젠테이션하는 것 및 노트 쓰는 것도 요점과 방식이 너무 다르고 퇴원 계획, 약 쓰는 거나 용량도 응급의학과 시절과는 너무나도 달라서 처음에는 너무나도 힘들었지만, 아직까지는 재미있고, 배우는 것도 좋아요. 2주 정도 지나니 시스템이 살짝 몸에 익어서 조금 편해진 것도 있고, 같은 환자를 주욱 보면서 관계를 형성하는 것도 재미있고, 응급의학과 시절과는 달리 시간의 압박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환자분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것도 재미있죠.  


자, 궁금하던 호기심이 이제 풀리셨는지...?


그럼 저는 내일 회진 준비하려 이만 가 보겠습니다... ㅎㅎ


 

(사진은 언제나 그렇듯이 인터넷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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