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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로운 뉴욕의사 Nov 09. 2020

죽음이 편안하게 다가오기까지.

오랜만에 선 주말 콜.

펠로우쉽 시작한 지 4개월이 지난 지금은 왕년의 응급의학과 어텐딩의 구력을 살려 여유롭게 팔로우업과 새로 온 컨설트까지 빛의 속도로 뚝딱 볼 수 있는 레벨이 되었다.




오늘 나에게 온 컨설트는 40대 초반에 식도암 선고를 받고 이제 거의 치료의 말기에 온 우리 E 씨.

내가 좋아하는 선한 눈을 가진 사람 중에 한 명이라 대화의 시작부터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호스피스 완화의학이 필요한 분야는 대략 2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통증, 구토, 숨참 과 같은 의학적인 증상을 치료하여 환자분을 좀 더 편안하게 해 드리는 것과,

환자분들의 가치관을 알아가며 End of life care의 목표를 재정립하는 것인데,  

나는 주로 대화의 시작을 논리를 사용하는 증상 스크리닝으로 시작한다.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속이 메슥거리거나 숨이 차거나 하지는 않는지 등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면,

스리슬쩍 Goals of Care discussion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살짝 열린다.


우리 병원에서는 환자와의 첫 만남에서 공통적으로 물어보는 질문 5가지 정도가 있다. 처음 만나는 사람한테 물어보기 진짜 어색한 질문들인데, 그래도 이렇게 표준화를 시켜두면 오히려 나 같은 사람에게는 더 편하다.


How much do you understand about your illness? 현재 병세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세요?

아... 나는 내가 이제 거의 내 인생의 끝자락에 있다는 거 알아요.


...........

아직도 이럴 때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나는 잠깐 침묵한다.


What is your expectation for the future? 앞으로 남은 시간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세요?


I want to be at peace with death.  죽음이 좀 편안하게 다가오면 좋겠어요.


.....

그 말에 실린 무게를 되새기느라 또다시 잠깐의 침묵.


음... 사실 그건 쉬운 일이 아닌데...  어떻게 하면 그게 될까요?

생각날 때마다 기도하죠.

아, 종교가 있으세요?

네, 가톨릭이요,


이 정도의 신앙은 아마도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튼튼하게 뿌리 내려온 것일 것  같아서 살짝 물어봤다.

 

모태신앙이세요?

네.

어머, 그럼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해 본 적 한 번도 없으세요?

아, 당연히 있죠. 종교가 이성적으로 말이 안 되는 건 알아요. 하지만 결국 선택인 거죠.

음... 전 둘 다 말은 되던데, 신이 없는 세상은 너무 우울하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신을 믿기로 했어요.



뉴욕 교외에서 아내와 6명의 자녀들과 은행에서 일하시며 행복한 삶을 누리시던 우리 E 씨는 2년 전 어느 날, 식도암 진단을 받고 직장을 그만두고 병마와 싸워 오셨다. 식도암의 가장 안 좋은 점 중 하나는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가 없게 된다는 건데, 수많은 수술과 시술을 번갈아 하신 우리 E씨도 뭘 먹을 때마다 사레가 들리면서 흡인성 폐렴이 생겨서 현재 입원 중이시다. 수많은 수술과 암의 진행으로 인해 식도 협착증이 생겨서 내시경으로 스텐트를 박아서 다시 넓혀야 할지 아예 식도를 우회하는 튜브를 박으실지를 결정하는 것이 지금 당장의 현안 중 하나라, 슬쩍 물어봤다.


혹시 둘 중에 뭐 더 마음이 가는 시술이 있으세요?  

아, 사실 나 두 개 다 예전에 받아 봤는데.... 둘 다 완전 최악이에요... 그런데 튜브가 아무래도 나을 것 같아요. 이걸 받고 나면 좀 편안해져서 집에 가서 마지막을 준비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아내에 토끼 같은 자식들이 6명이나 있고, 아직 40대 초반인데 과연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가 있을까...?

너무나도 우울한 상황에 비해 비교적 담담해 보이시던 E 씨.

흔히 말하는 신앙의 힘으로 일반 사람은 범접할 수 없는 레벨의 평안을 유지하는 그를 보면서 해묵은 나의 신앙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이 영원할 것처럼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의 일상은 그렇게 별 특이사항 없이 계속 지속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의 시계는 똑같은 시간이지만 굉장히 다르게 간다. 그리고 내 시계가 언제 그렇게 탈바꿈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인생의 매 순간순간이 선물이라는 구태의연해 보이던 말이 순간 클릭! 하면서 이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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