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슬기로운 뉴욕의사 Dec 07. 2020

나의 파키스탄 이야기 1.

슬기로운 뉴욕의사의 파키스탄 지진  난민캠프 구호활동 이야기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인 2005년 10월 8일,  

내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의대생이던 시절,

파키스탄에서는 강도 7.6의 지진이 일어나 8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하고 수십만의 이재민이 생겨났다. 


  한국에서 멀쩡히 밥 잘 먹고 학교 잘 다니고 있던 나에게 이게 왜 중요하냐고 물으면, 

글쎄, 사람마다 생각은 다르겠지만 나는 그때 재난의학 전문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히 가지기 시작하면서 그 현장에 가서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진이 난 지역이 산악 지역이라 날씨도 추운데 집이 다 무너져서 난민 캠프에서 살면 춥고 우울하지 않겠어?  

 

     때마침 나의 모교는 그 해 개교 120주년 기념으로 재학생들이 프로젝트 기획서를 내면 선별해서 펀딩해 주는 공모전을 하고 있었다. 때마침 12월 말에 2주 간의 겨울 방학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 음.. 그럼 그때를 틈타 파키스탄을 한 번 가 볼까? 하고 주변에 샤바샤바 수소문을 하여 팀을 만든 후, 일필휘지로 제안서를 작성하여 마감시간에 땡~ 맞춰 제출하였다. 속으로 이게 되면 나 진짜 재난 의학 한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헉. 그런데, 정. 말. 되었다. 


    선택이 되어서 돈을 받고 출발할 때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파키스탄의 지진 재난 지역에서 이미 일하고 있는 한국 NGO를 찾아 연락하여 모 의대 3학년 학생들인데 이리이리하여 저리저리하여 파키스탄을 가겠습니다 라고 했더니 선뜻 제의를 수락하셨다. 우리들 만으로 의료팀을 짜기에는 의료 기구 및 경험도 너무 없어서 의료 봉사는 힘들 것 같아 난민 캠프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게 될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짰는데, 펀딩을 받은 돈이 충분했기 때문에 장난감과 학용품을 우리가 계획한 대로 마음껏 살 수 있어서 너무나 기뻤다. 준비 과정에서 기억나는 일화 중 하나는, 그 당시 아빠가 외국에 계셔서 네이트온(스마트폰도 없고 카톡도 없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엔 이런 메신저가 연락의 주요한 수단이었다 ㅎㅎㅎ) 으로 문자를 보내던 시절이었는데, 아빠에게서  "요즘 파키스탄 날씨가 많이 춥다던데..."라는 요지의 장문의 문자를 받고는 어, 이거 가지 말란 말인가? 역시 아무리 우리 아빠지만 파키스탄은 무리였나...? 하다가 곧이어 온 문자가 "준비 단단히 하고 가거라" 여서 그때 같이 있던 친구와 함께 빵~ 터졌던 기억이 난다. 


    난민 캠프가 있는 지역은 파키스탄의 북쪽 산악 지역이라 가장 가까운 국제선이 다닐 만한 대도시가 이슬라마바드라는 파키스탄의 수도이다. 그런데 아뿔싸. 우리가 원하는 날짜에 그 루트는 만석이라 다 팔렸다. 방학이 2주뿐이라 현장에 있는 시간을 최대한 길게 하기 위해서 일정에 여유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다시 찾아봤더니 이슬라마바드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또 다른 대도시 라호르로 가는 비행기는 아직 자리가 남아 있어서 같이 일하기로 한 NGO에 말씀을 드렸더니 라호르로 우리를 마중 나올 분을 보내 주시기로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거기에 내려서 뜬금없는 대우 고속버스를 타고 안내양 언니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주는 도시락과 음료수를 먹고 마시며 사막을 달려 이슬라마바드에 도착하였다. 

은하산방님의 네이버 블로그 사진과 설명입니다 https://m.blog.naver.com/PostList.nhn?blogId=nimbus89


 

 파키스탄의 '스탄'은 땅 이란 뜻인데, 그래서 이름에 스탄이 들어가는 나라들은 전부 내륙에 위치한다. 그래서 대부분 건조하고 겨울에 많이 춥다. 심지어 이 파키스탄의 산지는 그냥 산이 아니라 그 이름도 유명한 히말라야 산맥의 언저리에 있는 산지라 정말 '산'이다(우리는 흔히 히말라야 하면 네팔을 생각하지만, 그건 그중 유명한 에베레스트 산이 있는 곳이고 히말라야 산맥은 중국, 부탄, 인도, 파키스탄에 걸친 넓디넓은 산맥이다). 왠지 가다가 서 버릴 것만 같은 세단의 앞좌석에 운전사 아저씨와 통역 자베드 아저씨를 앉히느라 우리 네 명이 뒷좌석에 구겨져서 끼어 타고 조금만 더 가면 굴러 떨어질 것만 같은 낭떠러지 커브를 굽이굽이 올라 도착한 난민 캠프는 넓디넓은 모래 펄펄 날리는 평지에 수많은 텐트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그리고 그 안에는 수천수만 명의 하루아침에 집을 잃은 사람들이 몇 달째 살고 있는 곳이었다. 


 

정말 딱 이런 곳이었다. 사진의 출처는 우측 하단에 잘 표시되어 있죠? ;)


    우리들도 집행부들이 모여 있는 곳에 저런 텐트를 하나 치고 생활했는데 밤에 정말로 추워서 옷을 다 입고 가져간 침낭 속에 들어가도 히말라야의 추위가 뼛속까지 파고 들어왔다. 다행히 한국 NGO 측에서 우리에게 전기장판을 한 장 나눠 주셨는데, 우리는 네 명이었기 때문에 그 한 장의 전기장판에 모두가 눕기 위해서는 다닥다닥 붙는 건 물론이고 심지어 교차로 누워 장판 면적을 최대한 활용하여야만 했다. 다른 사람의 발이 내 얼굴 옆에 있는 건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추운 것보다는 낫잖아? 전기장판도 없이 맨땅에 자는 난민들은 우리보다 10배는 더 추울 것이라 생각하면서 하루하루를 버텨나갔다.  그리고 가끔 여진도 와서 깜짝깜짝 놀라고 했는데, 이때의 경험은 훗날 나의 응급의학과 레지던트 지원 자기소개서의 첫 문단에 잘 요약되어 있다. 


"The earth was shaking violently.  Numerous objects fell to the ground as I woke abruptly from sleep. It was an aftershock. A spine-shivering fear of death aroused me. Fortunately, after a few minutes, it subsided. It was my first night in the refugee camp in Pakistan."


*표지 사진은 미 국무부 홈페이지. 



 


매거진의 이전글 20년 만에 돌아온 그곳, 어퍼이스트사이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