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슬기로운 뉴욕의사 Sep 14. 2021

어느 한국인 사업가의 죽음.

실리콘 밸리의 한국인 사업가 O 씨의 이야기

    어느 봄날 환자로 만난 O 씨. 선명한 한국 이름에 약간의 반가움과 함께 차트 리뷰를 시작하였다. 나이가 그렇게 많은 분은 아니셨는데 또 그렇게 흔한 암은 아니라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이 분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호기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언뜻 주소를 봤더니 그 넓은 미대륙을 횡단하여 오신 분이라 다시 한번 갸우뚱...


    문을 열고 들어간 병실에서 만난 O 씨는 친근한 외모의 중년 아저씨셨다. 통증에 살짝 찌푸려진 얼굴이었지만 예의 바르고 정중한 태도가 몸에 배신 분. 영어가 유창하셔서 계속 영어로 이야기를 하다 인터뷰가 끝나갈 때 즈음 편찮으신 몸으로 집에서 떠나 멀리 입원하러 와 낯선 환경에 계신 환자분한테는 왠지 모국어로 말씀드리면 혹시나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해지실까 해서 살짝 여쭈어보았다.


" 한국분이시죠...? "

갑자기 표정이 확~ 펴지신다.

" 아, 네~! "

그러면서 한국어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셨다.

이렇게 좋아하실 줄 알았으면 진작 한국어로 여쭈어 볼 걸 그랬다.


   O 씨는 십 대에 미국으로 이민 오셔서 갖은 고생 끝에 현재 실리콘 밸리에서 테크 회사를 하고 계시는 성공한 한국인이셨다. 고생하시던 시절 노출된 물질들 때문에 암이 생긴 것 같다면서 속상함을 토로하시며 아들들이 있는데 큰 아들이 곧 결혼한다고,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얼마나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살짝 불안감을 비추셨다. 이렇게 먼 곳에서 한국인 의사를 만나서 너무 반갑다고 하시며 아내분과 함께 우선 병원 근처의 호텔에서 묶고 계신데 빨리 시술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회사 역시 일단은 파트너들이 맡아서 경영하고 있는 중인데, 그래도 이것저것 신경 쓰이는 일들이 많아서 걱정이 된다고 하신다.

 아... 고생 참 많이 하셨을 텐데...

좀 더 대화를 이어가고 싶었지만 피곤해하시는 것 같아 이만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병실을 나와 만난 치료팀에 O 씨 이야기를 했더니,


" 아, 그분~ 우리 병원으로 그 시술받으러 몇 달에 한 번 씩 그 멀리서 오세요. 심지어 전부 비보험이야~ "

헉, 그 시술을 전부 비보험으로 우리 병원에서 하려면 엄청난 금액이 들 텐데.

O 씨, 정말 성공하신 분이구나.



     다음날 아침, O 씨 병실을 찾아 인사를 드리자 얼른 자세를 고치시며 일어나 앉으셨다. 언어는 사람 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특성이 있다. 편하게 하시라고 말씀드리며, 간 밤에 편히 주무셨는지 어제 쓴 약이 효과는 좀 있었는지 등등을 여쭈어보았다. 그리고 암 진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으신지도 살짝 여쭈어 보았다.


"속상하죠.... 억울하기도 하고. "


O 씨는 전형적인 한국 중년 남성들처럼 말수가 아주 적지는 않으셨지만 그렇다고 또 완전 여기분들처럼 자신의 감정에 대해 편안하게 이야기하시는 분은 아니셨다. 그 복잡한 심정이 ‘속상’하고 ‘억울’한 정도로 간단하게 표현되는 것은 절대 아닐 테고, 뭔가 실마리를 잘 던져주면 대화가 이어질 수 있을 것 같기도 했지만, 한국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우리 사이에 생겨난 격식감에 살짝 망설여졌다. O 씨의 마음속을 더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그만 접고 병실을 나왔다.






 내가 아는 '전형적인' 한국 남성들은 자신의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별로 편해하지 않는다. 어떠한 시련이 닥쳐와도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헤쳐나가는 것이 숙명이오, 자신의 불안감을 표현하거나 심지어 눈물을 보이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대한민국의 남자들.  자기가 태어난 땅을 떠나 생면부지의 낯선 땅으로 이민 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고생인데, 무림 강호 실리콘 밸리에서 창업하시고 회사를 여기까지 키워나가기까지 얼마나 산전수전 다 겪으시며 구르고 또 구르셨을까. 그렇게 이제 좀 인생이 풀리나 싶을 때 맞이한 암 진단.  이제 가족들과도 좀 더 웃으며 퀄리티 타임을 보내고, 아들이 결혼하여 손자 손녀 낳는 것도 보고 싶은데 O 씨의 삶의 시계는 갑자기 전속력으로 끝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 기저에 깔린 억울함과 분노, 그리고 두려움의 깊이를 나는 상상조차 할 수도 없지만 그나마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고 싶었다. 나의 그 안타까운 마음들이 아저씨에게도 전해졌을까.   


O 씨는 그 후 한 번 더 오셔서 시술을 받으시고 난 후, 별 차도가 없어 종양 전문의와 상담 끝에 호스피스 케어를 받으시기로 결정하시고 댁으로 돌아가셨다.

 

 시간이 흘러 이제 가을의 문턱에 서 있는 지금, O 씨는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


  표지 사진은? https://vistapointe.net/silicon-valley.html



매거진의 이전글 뭣이 중헌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