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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로운 뉴욕의사 Dec 11. 2021

나의 중국

그리고 탈북민으로 오해받은 이야기. 

2008년 4월, 나는 중국에 가 보기로 결심했다. 


    그해 여름부터 미국에서 수련을 받기로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떠나기 전에 나의 대륙 아시아를 좀 더 보고 싶었고, 그중에서도 아시아의 대국, 중국을 보고 싶었다. 어린 나의 기억에 먹물을 벌컥벌컥 마시던 신하들로 강하게 뇌리에 남아있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부의의 비운의 삶을 그린 영화 '마지막 황제'의 배경인 자금성과 그 옛날 진시황이 쌓았다는 만리 장성도 있는 베이징은 꼭 한 번 가 보고 싶은 환상의 도시였다. 때마침 그 해는 베이징 올림픽이 열리는 해였는데, 왠지 올림픽이 끝나고 나면 중국이 확 바뀌어 버릴 것 같아서 그 전의 중국을 봐 두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4개월이 딱히 큰 차이를 만들었을 거 같진 않지만. 

자신의 무너져가는 왕권을 확인하기 위해 신하에게 먹물을 마시게 하는 철없지만 애잔한 애신각라씨. 출처는 네이버 블로그 미디어 라이징 by 라이더 M

  당시는 아직 중국에 관한 편견들이 꽤 있을 때라, 여자 혼자 가면 위험하다는 등 의사소통이 안 된다는 등 반대 의견이 살짝 있었지만 나는 미국 의사시험을 준비하면서 머리도 식힐 겸 취미 삼아 중국어 공부를 좀 했었고 + 漢字(한자) 키드였던지라, 큰 어려움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상하이, 베이징, 시안의 세 도시를 골라 계획을 짜고 임청하 같이 생긴 스튜어디스분들이 있을 것 같은 동방 항공을 타고 상하이로 날아갔다. 


    상하이는 중국 최초의 개항항 중 하나답게 국제화가 일찍부터 시작된 곳이라 예상대로 내가 원하던 중국 고유의 느낌은 별로 남아있지 않았다. 뭔가 신주쿠에 사람이 복작복작 한 3~4배는 더 많이 있는 그런 느낌? 시장에 먹을 것이 한 100가지는 걸려 있는 것 같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것저것 먹어보고, 사진으로 보면서 조명 색깔이 내 취향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동방명주를 실제로 보고 외탄을 걸은 정도? 그리고 로망의 야간 침대 열차를 타고 베이징으로 갔다.  

 

    나는 베이징이 너무 좋았다. 정말 내가 생각하던 것 딱 그대로였다. 자금성에 갔을 때는 지금이라도 북소리와 함께 둥둥둥 아이신 교로 푸이 씨(부의 황제의 만주 이름)가 걸어 나올 것만 같았고 만리장성에 갔을 때는 구불구불 산을 가로질러 굽이치는 내 눈앞의 장성이 금방이라도 용으로 승천해서 하늘로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 유명한 베이징 오리도 먹어보고(혼자라서 한 마리 다 못 먹어 얼마나 안타까웠던지!). 올림픽을 맞아 엄청나게 건설붐이 일고 있던 베이징의 개발 열풍을 살짝 비껴간 듯한 후통에서는 시간을 거꾸로 간 듯한 베이징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엿볼 수 있었다. 걷는 걸 좋아하는 나이지만, 대륙의 스케일답게 중국의 한 블럭은 너무나도 커서 지도상에 가까워 보이는 곳도 직접 걸어보면 꽤 멀어서 정말 원 없이 걸어 보았다. 온 거리에 붙어있던 同一个世界 同一个梦想(하나의 세계, 하나의 꿈. 베이징 하계 올림픽의 표어)은 그 당시에도 왠지 앞으로 닥칠 중국의 단일화 정책 하나의 중국(一个中国)의 서막을 예고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일개 여행자니깐... 


  어느 날은 버스를 타고 가다 너무 심심해서 옆에 앉은 사람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중국에서 한국인의 이미지가 꽤 괜찮았기 때문에, 재기 발랄한 한국 아가씨가 말을 걸자 내 옆에 앉아있던 중학생쯤 돼 보이던 친절한 남학생은 내 얘기를 잘 받아 주었다. 

어설픈 중국어로 떠듬떠듬 어제는 어디 가고 내일은 어디 갈 거고 하는데 '오늘' 단어가 중국어로 생각이 안 나서 

"어제(昨天)", "........ " , "내일(明天)" 

하면서 물어봤는데 그 아이가 자꾸 못 알아듣자 옆에서 우리를 보고 있던 다른 애가,  

 "今天"! 

하고 가르쳐 주던 기억이 난다. :) 

 

 지금도 베이징을 생각하면 난 참 좋은 기억들이 많아 한 6개월에서 1년쯤 살아보고 싶은 마음도 있다. 하지만 베이징의 대기 오염은 진짜였다. 하루의 일정을 마치고 집에 와서 코를 풀면 시커먼 숯 같은 것이 점점이 나왔는데 이런 경험을 한 곳은 내 여행 인생에 아직까지 베이징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지금은 어떨까..... ;;;  

 

 그때도 지금도 나는 여행 계획을 유동적으로 세우는데, 내가 베이징에 있던 때는 중국의 최대 명절 중 하나인 노동절과 겹쳐서 사람이 엄청나게 많았다. 나는 그때 내 인생 보아야 할 인파는 다 본 것 같은데, 그 때문에 다음 여행지로 갈 시안행 침대열차표가 다 팔려 버렸다. 알고 보니 노동절 기차표는 몇 날 며칠 밤을 새우고 줄을 서서 사는 표라고 한다. 쿨하게 '아 뭐 그럼 비행기  타고 가지' 하고 에어 차이나 웹사이트를 갔다 우연히 영어로 된 홈페이지보다 중국어로 된 홈페이지의 티켓 가격이 더 저렴한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이런... 어딜 가나 나그네는 사회적 약자인가... 하면서 당연히 중국어로 표를 사고 나는 진시황의 병마용을 보기 위해 시안으로 떠났다. 


 시안은 상하이, 베이징과는 다른 스케일의 중국 소도시(상대적으로)로 다른 두 도시에 비해 소도시의 소박함이 매력적인 곳이었다. 그리고 정말 당연한 말이지만 진시황릉에는 정말 병마용이 많다. 내가 갔을 때 한창 2 호갱, 3 호갱 발굴 중이었는데 이제는 다 팠을까...  


 

  그렇게 나만의 중국 일주를 마치고 친구들이 기다리는 동남아를 가기 위해 시안 공항에서 방콕행 비행기를 타려고 출국 수속을 하는데 검사관이 내 얼굴과 내 여권, 그리고 중국 비자를 번갈아가면서 계속 보더니 잠깐 있으라고 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는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불러왔다. 나도, 나를 맡았던 분도 영어를 할 줄 알았기 때문에  이건 뭐지 했지만 어쨌든 간에 나는 네이티브 코리언 스피커가 아닌가. 그 원어민 만이 가질 수 있는 자신감으로 어 너 좀 하는구나~ 그래 나랑 한 번 한국어의 향연을 벌여보자꾸나 하며,


" 어유, 한국어 정말 잘하시는데요? 어디서 배우셨어요?"


한 마디 해 줬더니 기선을 제압당한 듯 뭔가 어정쩡한 표정을 지으면서 주춤주춤 하시다 물러가셨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는 중국에서 동남아로 넘어가는 것이 유명한 탈북민 루트의 일부였는데,

웬 여자 혼자 여기저기 도장 엄청 찍힌 한국 여권에 동티모르산 중국 비자를 가지고 어설픈 중국어를 하며 태국으로 가겠다고 하니 뭔가 수상쩍었나 보다. 나는 그 해 초 몇 달간 동티모르에서 일을 했는데, 그 당시 이미 중국 여행을 계획 중이었기 때문에 주한 중국 대사관보다 엄청 한산한 주 동티모르 중국 대사관에서 방문 비자를 미리 받아 두었었다. 그래, 검사관 언니도 동제문(東帝汶. 동티모르의 한자 표기) 제력 시(帝力市. 동티모르의 수도인 딜리의 한자 표기) 산(産) 비자는 그날 처음 봤겠지... 이해해. 


그. 런. 데. 

나 자칫하면 북한 갈 뻔했던 거냐

 

아무튼 그렇게 나는 무사히 비행기를 타고 친구가 기다리고 있는 방콕 공항으로 떠났다. 


再见中国 (또 보자, 중국), 재미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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