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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윤제 Nov 07. 2022

옥수수밭의 구덩이

10,

여자가 사내에게 삽을 건넸다. 삽을 받아 든 사내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본 여자가 쪽문을 열고 들어가서 칼을 잡고 양파를 썰기 시작했다. 사내가 일어나서 술값을 바에 올려놓은 다음 삽을 들고 세상 전부를 얻은 표정으로 술집을 나갔다.

 그날 밤 그는 쉬이 잠들지 못했다. 아무도 없는 집안을 기웃거리는 사이에 술이 깨어버린 것이다. 창문을 활짝 열고 침대에 누웠다. 문득 ‘인과관계’란 단어가 떠올랐다. 그는 늘 세상 모든 일이 인과관계로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집 옆 황무지에 까마귀 떼가 날아온 것도 이유가 있었고 까마귀 떼가 사라지고 옥수수가 황무지를 뒤덮은 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믿었다. 다만 우둔한 자들이 그 까닭을 알지 못할 뿐이었다. 그런데 옥수수가 황무지를 장악한 뒤에 자신에게 일어난 일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결과를 만들 원인을 제공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것이 고통스러웠다. 그때 어디선가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나서 골목으로 난 창문을 내려다보았다. 한 사내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골목길을 걸어오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한쪽 어깨에 삽을 걸친 사내의 얼굴을 비추었다. 눈먼 여자에게 얻어맞고 삽을 얻어간 코 큰 사내였다. 그의 집을 지나쳐간 사내가 황무지 앞에 다다랐다. 무성한 옥수수를 흘긋 쳐다본 사내가 히죽 웃었다. 그런 다음 삽으로 옥수수의 목을 뎅강 자르며 황무지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는 옷을 걸쳐 입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사내의 뒤를 쫓아서 옥수수밭으로 들어갔다.     

 코 큰 사내의 묵직한 목소리가 그의 상념을 깼다.

 “오늘 성과는 좀 있으셨소?”

 “뭐라고 하셨습니까?”

 “구덩이에서 뭐가 좀 나왔냐고 물었소.”

 그는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낸 다음 오늘 구덩이를 파면서 일어난 신비로운 현상을 상세하게 코 큰 사내에게 들려주었다. 그의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는 듯 코 큰 사내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중요한 건 진실이요. 진실하지 못하면 서로 연결될 수 없소. 연결되지 못하면 당신이 원하는 걸 얻을 수 없을 거요.”

 “연결이라고요?”

 “반드시 내 말을 명심하시오.”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의 질문을 무시하고 곡괭이를 집어 든 사내가 근엄한 표정으로 땅을 내리찍었다. 땅 깊이 들어간 곡괭이를 홱 젖히자 시커먼 흙덩어리가 끌려 나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는 천천히 돌아섰다. 자신의 구덩이를 향해서 걸어가며 진실과 연결을 생각했다. 그러나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을 연결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구덩이에 도착했다. 흙더미에 자신의 이니셜이 적힌 삽이 표석처럼 꽂혀 있었다. 그는 삽을 빼 들고 구덩이로 들어갔다. 푸른 달빛이 출렁거리며 몸을 휘감았다. 구덩이 중심으로 다가간 그는 방향을 가늠한 다음 삽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흙을 퍼내기 시작했다. 무리하지 않았다. 욕심을 부리지도 않았다. 그저 조금씩 흙을 퍼냈다. 중심부가 점차 드러났다. 이윽고 걸리적거리는 흙을 제거한 그는 그것을 향해 삽을 밀어 넣었다. 순간 강한 파열음과 함께 삽 끝에 단단한 게 닿았다. 삽을 빼낸 그는 무릎을 꿇고 흙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딱딱하고 차가운 게 손에 잡혔다. 끄집어내서 살펴보니 자기 조각이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자기 조각을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자기 조각을 내 던진 그는 손으로 구덩이 중심을 헤집었다. 깨진 자기 조각이 계속 나왔다. 그게 전부였다. 구덩이에는 자기 조각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손이 아팠고 어깨가 욱신거렸다. 그는 구덩이에 벌렁 드러누웠다. 느낌은 거짓이었다. 처음부터 구덩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있었는데 코 큰 사내를 만나고 온 사이에 다른 곳으로 가버린 것이다. 자신을 기다려주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늘 그랬다. 지금껏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전부 그런 식이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실핏줄이 훤히 드러난 밝은 달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구덩이는 편했다. 어머니 뱃속처럼 안락했다. 구덩이를 에워싼 옥수수가 바람에 쏴아쏴아 흔들렸다. 마치 파도 소리처럼 황무지를 울렸다. 어디선가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운 곳이었다. 다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구덩이를 파는 소리였다. 헛된 기대와 희망을 품은 사람들이 옥수수밭에서 구덩이를 파고 있었다. 그는 옥수수가 흔들리는 소리와 삽과 곡괭이가 구덩이를 파는 소리와 들으며 서서히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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