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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윤제 Nov 07. 2022

옥수수밭의 구덩이

9,

그가 술집을 찾아간 날은 가출한 딸을 찾아 돌아다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묵직한 피로를 짊어진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술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테이블은 말발굽 형태의 바가 전부였다. 주인 여자를 본 그는 흠칫 놀랐다. 두 눈이 있어야 할 자리가 움푹 꺼져 있었다. 그냥 눈이 먼 게 아니라 눈동자가 아예 없었다. 그는 잠시 망설였지만,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이 없었기에 자리에 앉았다. 목까지 단추를 채운 녹색 옷을 입은 여자가 물었다.

 “무얼 드실 건가요?”

 그는 술집 벽에 걸린 메뉴판에서 돼지고기 숙주나물 볶음을 골랐다. 여자가 냉장고에서 재료를 하나둘 꺼냈다. 그녀는 먼저 양파를 채 썬 다음 대파를 어슷하게 썰었다. 그리고 얇게 썬 돼지고기에 후추를 뿌려 버무린 다음 프라이팬에 올렸다. 돼지고기가 익어가자 다진 마늘과 대파와 양파를 넣고 볶다가 미리 준비한 소소를 넣고는 천천히 불을 껐다. 한 치의 오차 없이 기계가 돌아가듯 정확한 동작이었다. 그는 소주를 한 잔 마시고 돼지고기와 숙주나물을 입에 넣었다. 맛이 있었다. 며칠 동안 딸의 학교 친구들이 가르쳐 준 낯선 동네를 헤집고 다녔다는 사실을 잊을 만큼 뛰어난 맛이었다. 그는 묵묵히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잘한 것과 잘못한 게 뒤섞여서 한 덩어리가 되었다. 다시 체로 걸러내자 하나가 남았다. 그런데 그게 뭔지 알 수 없었다.

 소주병이 비어갈 무렵 출입문이 덜컹 열리면서 한 사내가 들어섰다. 어깨가 떡 벌어진 사내는 좁은 술집을 휙 돌아보고는 바에 앉았다. 사내는 소주와 어묵탕을 주문했다. 여자는 펄펄 끓고 있는 냄비에서 어묵을 덜어서 내놓았다. 사내는 소주를 마시고 어묵을 입에 넣고 와작와작 씹어먹었다. 잘게 잘린 어묵을 꿀꺽 삼킨 사내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눈먼 여자가 날이 시퍼런 식칼로 양파를 썰기 시작했다. 냄비에서 어묵 국물이 끓는 소리와 칼날이 도마를 내리치는 소리가 천장을 울렸다. 사내는 계속 혼잣말을 중얼거렸고 냄비가 끓어 넘칠 때마다 여자가 찬물을 살짝 부었다. 들썩거리던 냄비가 젖을 먹은 아이처럼 조용해지면 여자는 다시 양파를 썰었다. 칼날이 점점 빨라졌다. 탁탁탁, 칼날이 양파를 절단하는 소리가 좁은 술집을 울렸다. 그는 눈먼 여자의 손을 응시했다. 시퍼런 칼날이 여자의 왼손을 아슬아슬하게 빗겨 칠 때마다 심장이 펄떡거렸다. 칼날이 미끄러져 손가락을 내리치는 순간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눈먼 여자가 칼을 멈추고 사내를 돌아보았다.

 “손님, 뭐가 필요하세요?”

 “빌어먹을, 술을 주시오.”

 눈먼 여자는 식칼을 내려놓고 돌아서서 냉장고를 열어 소주병을 꺼냈다. 그녀가 정확하게 사내 앞에 소주병을 내려놓았다. 소주병이 딸칵 열리는 소리를 들은 뒤에 눈먼 여자는 식칼을 집어 들고 양파를 다시 자르기 시작했다. 큰 소쿠리에 담긴 양파가 바닥날 무렵 돌연 사내가 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볍게 흐느끼던 사내가 점차 어깨를 들썩거리며 오열했다. 단순한 슬픔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쌓여서 흘러넘친 고통의 산물이었다. 급기야 사내는 머리를 바 상판에 쾅쾅 내리쳤다. 술병이 흔들렸다. 그는 알 수 없는 절망에 빠진 사내를 지켜보며 소주를 마시고 차갑게 식은 돼지고기와 숙주나물을 입안에 욱여넣었다. 그때 눈먼 여자가 쪽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사내에게 다가간 여자가 갑자기 뺨을 후려쳤다. 사내가 뒤로 벌렁 넘어졌다. 여자가 쓰러진 사내의 멱살을 움켜잡고 뺨을 계속 내리쳤다. 철썩거리는 소리가 천장을 울렸다. 사내의 오른쪽 뺨이 벌겋게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여자는 손을 휘둘렀다. 그 모습에 그는 몸을 떨었다. 이윽고 눈먼 여자가 손을 멈추었다. 여자가 천천히 돌아서서 쪽문 옆 창고 문을 열고 뭔가를 꺼냈다. 삽이었다.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새 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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