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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Frame Dec 02. 2015

글씨를 쓰다

숨 가쁘게 어찌어찌하여 모든 일이 해결되었다. 피가 한 방울도 남아있지 않은 듯한 몸뚱이를 지하철 의자에 던져 놓고 핸드폰을 꺼냈다. 무사히 끝난 걸 알리려던 찰나 꺼져 버린다.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덜컹덜컹 인적이 드문 열차는 하루 종일 달려도 지친 기색이 없다. 

뭔가 적고 싶은 생각이 들어 폰을 들었다가 방전되었다는 걸 재차 확인한다. 다행히 가방에 노트가 있고, 펜이 있다. 펜을 움직여 생각을 정리해 본 지가 얼마나 오랜만인지. 키보드를 두들기며 활자를 타이프하는데 익숙할 뿐, 오랜만에 적는 손글씨가 불편하고 어색하다. 이런 상황이 돼서야 겨우 그런 사실을 발견한다. 

천천히 자음과 모음을 번갈아 그려가며 단어 하나에, 문장 하나에 집중해 본다. 의외로 머릿속이 정리가 잘 되지 않는다. 다음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갈팡질팡한다. 일 때문에 뭔가를 적긴 하지만 거의 알아볼 수 없는 정도로 휘갈기기 일쑤다. 그 조차도 두세 문장을 넘지 않으니, 떠오르는 것을 정리하며 적는다는 것은 꽤나 어렵지만 신선한 일이었다. 

조금 탄력을 받아 생각이 앞질러 나간다. 펜을 부지런히 움직여 열심히 따라간다. 그러다가 생각이 거의 따라잡히면 그다음 쓸 것을 뽑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손이 잠깐 쉬어도 되지 않을까. 생각을 멈추고 지금껏 쓴 것을 읽어보며 흐름을 다듬어도 되지 않을까 싶지만, 생각과 손의 경주는 멈추지 않는다. 타자를 치는 것보다 한참 느리지만, 손과 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바쁘다. 

끊길 듯 이어지며 구불텅한 글씨는 작은 노트를 가득 채워 나간다. 하얀 화면에 반듯하게 정형화된 활자보다는 삐뚤고 엉망인 내 글씨가 조금 더 나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노트를 이리 보고, 저리 보고 한다. 고갤 들어보니 내릴 역이 이미 지나쳐있다. 이게 글씨를 쓰는 것의 매력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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