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nFrame Jan 15. 2016

당신의 시간을 즐기세요

#11.그리고 라테 한 잔, 지옥의 문

14.12.23, 파리, 오르세 옆 주택가

얼마나 걸었을까. 박물관의 휴관일을 체크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헛걸음만 반복하다가 결국 어느 카페에 몸을 던졌다. 깔끔한 수트를 차려입은 웨이터는 나와 힐끔 눈을 맞추고는 이내 자신의 일로 돌아간다. 서빙하고, 치우고, 마른행주로 잔을 닦고, 바리스타와 여유 있는 대화를 나누고, 앞치마 라인을 다시 정리할 때까지 주문받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또다시 힐끔, 손을 들고 큰 소리를 내어 불러야 하나 싶었던 찰나, 정확하게 정돈된 발걸음으로 다가와

준비 되었나요??

하고 질문을 건넨다. 내가 할 말을 뺏긴 것 같아 잠시 멍해져 있다가 간신히 라테 한 잔을 시킨다.

14.12.23 파리, La Fregate, cafe latte

꼬인 동선과 시간 낭비. 황망한 겨울바람을 그대로 안고 들어온 터였다. 일정을 어떻게 조율해야 할지 이것저것 뒤적거리며 굉장히 정신이 없던 차에, 예상하지 못한 반응을 만난 거다. 뭐가 준비되었냐는 것일까. 나의 여유와 평안까지도 그가 신경 써야 할 서비스의 일부였던 것일까. 오래지 않아 쟁반 위의 라테 한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눈을 맞추고, 미소를 건네고,

당신의 시간을 즐기세요.

그 순간. 깊고 입체적인 웨이터의 얼굴. 가볍게 돌아서며 펄럭이는 수트자락. 물에 스며드는 잉크 같은 재즈 선율. 자줏빛 벨벳으로 덮인 소파. 금박을 입힌 기둥. 천장을 가득 채운 그림들. 부서지듯 반짝이는 와인 잔. 나의 시간을 즐기라는 그 말과 함께 모든 것이 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제야 내가 어디 앉아 있는지 깨달았다. 앞에 놓인 라테는 부드럽고 향이 깊었다.

14.12.23, 파리, 오르세, 지옥의 문

이윽고 행복했다. 나는 파리에 있고, 라테를 마시며 다신 오지 않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째서 나는 불행하다 생각했을까. 모든 것이 꼬여가고 이젠 아무 희망이 남아있지 않은 것처럼 좌절했을까. 고작 몇 시간을 낭비하고, 이제 겨우 여행의 초반부였는데 말이다. 왜 나는 갖지 못한 시간을 그리워하며 내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을까. 왜 나는 내 시간을 즐기지 못했을까.


뒤늦게 찾아간 오르세 박물관. 남아있는 관람 시간은 부족했지만 만족했다. 없는 실력으로 그려내기엔 너무도 어려웠던 지옥의 문을 스케치한다고 시간을 보냈지만 즐거웠다. 전시되어 있는 걸작들의 태반을 놓쳤지만 행복했다. 난 온전히 나의 시간 속에 살고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래서 그릴 수 밖에 없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