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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Frame Jan 28. 2016

저마다의 빛을 내며 자리를 지킨다.

#12. 베르사유 궁전.

시외까지 나가는 RER C을 타고 한참을 달렸다. 오밀조밀한 파리의 시가지가 차장 밖으로 흘러갔고, 누군가가 연주하는 아코디언 소리와 덜컹거리는 객차의 리듬이 묘하게 맞아떨어져 흥겨웠다. 손끝으로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다 보니, 나도 모르게 베르사유에 도착해있는 것이었다.


14.12.24, 파리, 베르사유

짙은 안개에 가려 건물의 양 끝은 신기루같이 흐려져있다. 건물 뒤로 펼쳐진 정원과 대운하는 그 끝을 가늠할 수가 없다. 높이로 압도하는 다른 건축물과는 달리 베르사유는 깊이로 그 규모를 이야기한다. 전체를 그릴 엄두는 내지 못한다. 좌우 날개로 둘러싸인 광장 한가운데서서 겨우 정면을 스케치하다 보니 안개는 어느새 가랑비로 바뀌어있었다. 지붕의 황금 장식은 빗방울을 튀기며 더욱 반짝거렸고 파란 지붕은 비에 젖어 더 짙어졌지만 누덕 거리는 노트를 들고 비에 쫓겨 실내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14.12.24, 베르사유, Salon de Mercury

끊임없이 이어지는 방. 정해진 코스를 따라 미로 같은 왕궁을 헤매다가 빨간색과 황금색의 선명한 대비가 발길을 잡는다. 몇 백 년 전 누군가의 체온으로 덮혀졌을 침실. 닫힌 문으로 사람들이 드나들고 풍성하고도 거추장스러운 옷을 입은 왕족은 화려한 침대에 걸터앉아 시간을 낭비했을 것이다. 그들의 모습을 상상해보기엔 조금도 어려움이 없다.

14.12.24, 베르사유, Hall of Mirrors

그리고는 거울의 방. 수많은 인파가 오가는 복도 한구석에 등을 기대어 앉는다. 고개를 들어보니 기다란 샹들리에가 열을 맞추어 매달려 있다. 양초 모양을 한 전구가 주변을 붉게 물들인다. 천사, 요정 또는 그 무엇이 등장하는 천장화 주변으로 황금 장식이 가득하다. 왼편으로 가득한 창과 금빛 촛대, 오른 편으로 가득한 거울과 금빛 촛대. 반짝거리는 것들은 저마다의 빛을 내며 그 자리를 지킨다. 왕을 위한 연회가 열렸던 그때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제 빛을 내지 못하고 잠시 머물다 기다란 홀을 따라 흘러갈 뿐이다.

14.12.24, 파리, 베르사유

가슴팍으로 무릎을 모으고 앉아 눈에 보이는 것보다 한참 모자란 스케치를 겨우 완성시키고는 인파에 휩싸여 거울의 방을 떠난다. 비는 그쳤지만 하늘은 여전히 흐리다. 화려한 궁전 대문을 스케치한다. 더 이상 남아있을 수 있는 구실을 찾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린다. 여행지에서 영원히 머무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순간은 찬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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