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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복이 Aug 19. 2022

러브레터를 아시나요

도서관 대출카드로 생각난 그 영화

도서관에서는 가끔 책을 버린다. 오래되고 낡은 책을 버려야 새 책을 들일 수 있는 공간이 생기기 때문이고, 아무래도 새 책 위주로 대출을 많이 해 가기 때문이다. 책이 버려지는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새 책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마냥 옛날 책을 끌어 안고 있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무작정 버릴 수는 없고 1년에 버릴 수 있는 권수(전체 책 권수에 따른 비율)가 정해져 있어서 많이 훼손되었거나 내용이 심하게 달라졌다든가 몇 년 동안 대출 실적이 전혀 없다든가 하는 책을 골라서 버린다. 버리는 작업을 할 때는 우선 책을 골라 놓은 다음에 혹시 가져가고 싶은 학생이나 교직원들이 있는지 며칠 기다려 주기도 한다. 매달 보는 여러 가지 잡지도 1년 동안 모았다가 그런 방식으로 나눔을 한 후 남은 걸 버리곤 한다. 



요즘도 그런 작업 중이다. 우리 학교 사서 분께서 한참 책을 고르는 중이고 나눔을 하는 중이다. 그런데 어제 한 학생이 나에게 보물을 찾았다며 뭔가를 꺼내 보여준다. 그것은 종이로 된 대출이력카드였다. 전산화 작업이 되기 전 사용하던 것이니 적어도 20년은 된 물건이었다. 몇 명의 학생 이름이 적혀 있는 대출이력카드가 왠지 반가웠다. 내가 이 학교에 온 2005년에만 해도 전산화작업이 되었다 해도 이런 대출이력카드가 종종 눈에 띄었었는데 그동안 책이 계속 버려지면서 최근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물건이기 때문이다. 



"샘, 이거 가져도 되나요?"

"그러엄, 이 물건이 좋아? 가지렴."


사서 분께서 정리해 놓은 폐기 책 몇 권을 챙겨 가는 학생이 대출 카드를 가져도 되냐고 물어서 흔쾌히 가지라고 했다. 개인 정보랄 것도 20년 전쯤으로 예상되는 학번과 이름밖에 없어서 문제될 게 없었다. 대출카드를 가져간다는 그 학생은 평소 책을 좋아하고 시를 쓰는, 마치 도서관 단골과도 같은 친구다. 그래서 그 학생에게는 그 물건이 더욱 귀하게 느껴졌나보다. 


"와, 영화 러브레터 생각난다."

"러브레터요? 그게 뭔가요."



대출카드를 보고 있자니, 후지이 이즈키가 대출카드 뒷면에 동명이인인 후지이 이즈키 얼굴을 그린 게 뒤늦게 발견됐던 그 영화가 생각났다. 개봉 즈음 대단한 인기를 누리던 영화이고 너무나 유명한 영화라서 당연히 안다고 여긴 나는 순간 당황했다. 아, 맞다. 아주 오래된 영화라는 걸 깜박했다. 나는 그 학생에게 그 영화에 도서관이 등장하고 대출카드가 등장한다고 간단히 설명했다. 


때마침 행사가 있어 방문한 졸업생도, 사서 분도 그 영화를 몰랐다. 그때 대출대에 앉아 계시는 학부모 자원봉사자 분이 말씀하신다. 러브레터를 아신다고 말이다. 아, 그렇구나. 그 영화는 학부모 세대의 영화구나. 잠시 잊고 있었지만 나는 학부모들과 공감하는 게 더 많은 세대인 것이다. 자리로 돌아와 찾아보니 영화 러브레터는 1999년 개봉했다. 맙소사. 우리 사서 분이 1999년에 태어났고 대출카드를 찾은 학생은 2004년에 태어났다. ㅎㅎ



이런 경험은 수업 시간에도 많이 한다. 뭔가를 설명할 때 아주 유명한 영화나 드라마의 장면을 말하고 싶어도 그게 통하지 않는다. 90년대 이야기가 아니라 2000년대 이야기라 해도 아이들에게는 태어나기 전, 혹은 유아기 때 일이니 생소할 수밖에 없다. 내가 70년대에 태어났지만 70년대는 나의 시대가 아니라고 느끼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다보니 많이 노력해야 한다. 내가 어제는 2004년생 학생에게 영화 러브레터 이야기를 꺼내기는 했어도(왠지 그런 아이는 고전 영화라고 해도 알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있었나보다.) 평소에는 이런 간극을 잘 알고 있는 편이다. 이 아이들의 경험과 수준에 맞추기 위해, 항상 젊은 사고를 유지하기 위해 나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꽤 애쓰고 있다.



하지만 또 다른 문제는 최근에 가장 뜨거운 영화나 드라마를 이야기할 때도 사정은 비슷하다는 점이다. 요즘에는 모두가 공유하는 콘텐츠가 별로 없다. 몇몇은 공유할 수 있지만 모두가 끄덕이고 공감하는 내용은 사라진 듯하다. 영화관에도 잘 가지 않고 티비도 잘 보지 않는다. 유명한 영화나 드라마, 예능도 유튜브에 있는 짧은 영상 정도로만 접하는 학생들이 많다. 예를 들어 몇 년 전만 해도 엠넷에서 하는 쇼미더머니에 대해 학생들과 공개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수준이었는데 최근에는 '그게 뭔데요'하는 표정이 많아서 몇몇과 작은 대화를 할 수밖에 없다. 


아, 물론 '짤'이나 '밈'으로 재생산되는 몇몇 유명한 장면은 그나마 대다수에게 공유되어 있다. 예를 들어 영화를 모르는 사서 분도 '오겡끼 데스까'라고 외치는 장면은 안다고 한 것처럼, 학생들이 야인시대 드라마를 몰라도 '4달라'라고 외치는 김영철의 대사는 다들 아는 것처럼 말이다. 무한도전의 무야호는 열 살짜리 우리 아들도 안다.



그런데 러브레터라니, 게다가 별로 유명하지 않은 대출카드 장면이라니, 내가 심했구나. 아무리 내가 학생의 시선에 맞추려고 노력해도 '세대'를 무시할 수는 없나보다. 방송에서도 흔히 소재로 쓰이는 90년대 감성이 나에게 있나 싶기도 하다. 서태지와 아이들에 환호하고 일본 애니메이션을 불법 비디오로 돌려보던 세대, 열거하자면 끝도 없구나. 나의 20대는 일반적인 대중문화와 꽤 멀리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도 않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물론 그때를 생각하면, 마치 새 책을 들이기 위해 헌 책을 버리듯, 낡은 것들 혹은 버려야 하는 것들도 많다. 하지만 무작정 버리지 않고 잘 골라 버려야 하듯 그때의 문화적 감수성을 간직하고 싶은 것도 꽤 있다. 


그래서 말인데요, 지금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영화 러브레터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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