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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복이 Sep 06. 2022

이번 추석 타겟은 고기 산적으로 정했다.

- 명절이 다가온다, 나는 제사에서 뺄 음식을 말할 자격을 얻었다.

내가 어렸을 때 추석엔, 풍성했다.



어렸을 때는 세뱃돈을 받을 수 있는 설이 더 좋았다. 설 명절이 지나면 4남매가 세뱃돈을 조금씩 모아 과자종합선물세트를 사 먹던 추억도 남아 있다. 그래도 추석은 뭔가 풍성한 느낌이 있다. 평소 먹을 게 부족하던 시대를 살아낸 건 아니지만, 농촌 사회 특유의 흥이 있다고나 할까. 설 음식에 비해 추석 음식은 대부분 제철 음식이라는 이유도 있다. 밤이나 콩을 넣은 송편이 얼마나 맛있던지.



아버지와 우리 4남매는 명절 전날이면 버스로 2-30분 떨어진 큰아버지댁에 가곤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살아계실 때까지는 아버지의 8남매 가족과 작은할아버지 식구들까지 모두 모였으니 그야말로 대가족 잔치였다. 다양한 나이대의 집단끼리 모여 어울렸고, 나와 비슷한 또래도 수두룩했다. 나는 나보다 나이 많은 사촌들을 따라다니기도 하고, 혹은 나보다 어린 아이들을 돌보기도 하며 명절을 보냈다.



한 가지 의문은, 우리 엄마였다. 엄마는 명절날 아침이 되면 그때서야 큰댁에 얼굴을 비추곤 했다. 내 기억이 분명한지 모르겠지만 아예 안 오신 적도 있는 것 같다. 지금은 돌아가셔서 그 이유를 여쭤볼 수가 없지만, 이유가 무엇이었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많은 친척과 웃어른들의 눈치를 봤을 법도 한데, 그런 기색이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때는, 어릴 때에는 엄마가 없으니 약간 섭섭한 적도 많았다. 끼니 때가 되면 부엌일로 바쁜 와중에도 자기 아이들을 챙기는 게 엄마들의 속성이니, 우리 4남매는 그런 보살핌에서는 소외되기도 했다. 아버지는 뭐… 남자 어른들끼리 앉아 있는 방에서 나올 기색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를 따로 돌보시진 않았다. 나는 어린 막내의 특권으로, 가끔 다과상 먹을거리를 탐내며 그 방에 들어간 적도 있는데 왠지 모르게 숨이 막혀 잠깐만에 나와버리곤 했다.



요즘 나의 명절은, 편안한 편이다.



지금 명절은? 명절 부담감 그래프에서 내가 어느 정도에 위치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 정도면 소박한 편인지도 모른다. 나가는 돈이 많은 시즌이긴 하지만, 그 정도의 명절상여금이 들어왔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긴 시간을 들여 먼 곳을 왕복해야 하는 부담은 있지만, 부모님을 찾아뵙고 평소에 못 보던 형제 자매, 조카들을 만나는 일이니 그 정도 품은 들어도 된다. 추가로 설명하자면 시댁은 기독교 집안이라 제사가 없고 우리집은 엄마 제사를 지낸다.



제사가 없더라도 시아버님의 형제분들 가족이 우리 시댁에 모였기 때문에 예전에는 음식 장만이 제사하는 집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코로나 이후 형제분들 모임이 사라지거나 뜸해져서 이제는 직계 가족들끼리만 모이게 되었다. 내가 큰 역할을 했던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부담없는 명절이 된 건 틀림없다. 많은 가정에서 코로나로 명절 풍경이 확 바뀌었는데 그게 바로 우리 시댁의 모습이다. (아버님께서 들으시면 섭섭하시겠지만) 아직은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고 유지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우리집도 마찬가지로 직계 가족들끼리만 모인다. 우리집은 코로나 때문은 아니고, 몇 년 전 큰댁 식구들과 갈등이 있은 후 아버지 형제분들이 큰아버지 댁에서 모이던 명절 풍습이 아예 사라졌다. 큰댁에 가지 않은 첫해에 우리 식구들끼리 명절 점심에 햄버거를 사 먹으러 갔던 날이 아직도 기억난다. 단, 우리집은 돌아가신 엄마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 제사는, 한 명이든 여러 명이든 차리는 음식은 비슷하기 때문에 부담이 없는 건 아니지만 우리 식구들끼리라는 마음이 들어서인지 명절이 한결 편안해졌다.



하지만 내가 몰랐던 노력들이 있었다.



나의 그 부담감 그래프를 확 낮춰준 건 코로나와 큰댁 식구들의 태도지만, 그동안 꾸준히(그리고 여전히) 그 부담감을 떠안고 있던 건 바로 다른 이들의 노동이었다. 시댁에서는 며느리에게 일을 시키지 않으시려는 시어머니께서 끊임없이 부엌일을 하시며 맛난 음식을 차려 주셨고, 친정에서는 나 없는 사이 어머니(돌아가신 엄마 대신 아버지와 결혼하신지 20년도 넘었다)와 우리 새언니들의 부엌일이 이어졌을 것이다.


재작년쯤 새언니가 다시 직장에 나가면서 추석에 못 오시게 되었는데 그때 그걸 실감했다. 갑자기 나이 많으신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분의 제사를 혼자 준비할 걸 생각하니 죄송한 생각이 든 것이다. 아버지께서 본인이 살아있는 동안 엄마 제사를 시골집에서 지내겠다고 했는데 결국 20년 넘게 어머니께 맡겨 놓고 있던 셈이다.


이제라도, 조금이라도 내가 책임을 나누겠다며 제사 음식 중 전을 마련해가기로 했다. 새언니는 고맙다고 하지만 너무 당연한 걸 지금껏 함께하지 못한 게 미안할 뿐이다.


처음엔 시댁에 들렀다 가느라 대전 시댁 근처 유명한 전집에서 사 갔는데 다음엔 우리집에 먼저 가게 되어 집에서 해 갔다. 우리 가족이 잘 먹는 것으로 3-4가지만 하는데도 손에 익지 않으니 쉽지만은 않았다.



내가 책임진다는 것은 내가 없앨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전은 명절 음식의 대표이자 상징 같은데 제삿상에서는 고작 3가지의 음식일 뿐이다. 그 외에도 나물, 생선, 고기, 탕과 국 등등을 또 준비하신다. 나머지를 내가 할 수는 없으니 줄이자고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겨우 세 번째지만 내가 전을 준비하면서부터는 왠지 자격이 생긴 것 같다.


예를 들어 제삿상을 정말 상에 '차리는' 역할을 하는 오빠들이 제사 음식을 줄이거나 없애자고 하면 무척 반갑고 환영할 일이지만. 왠지 얄미울 것 같다. 무슨 말인가 하면, 왜 그걸 오빠들이 결정하냐는 거다. 20년 넘게 애쓴 어머니가, 새언니가 그리고 오래 되진 않았지만 엄연히 3가지의 음식을 장만하는 내가 같이 결정했음 좋겠다.


생각해 봐라, 행사는 다른 사람들이 다 준비했는데 무대 인사 하는 사람이 행사 취소합니다, 이러면 좋겠는가.


슬슬 우리 가족이 잘 먹지 않는 제사 음식을 하나씩 하나씩 줄여보자고 할 생각이다. 일단 이번 명절 타겟은 고기 산적이나 커다란 조기찜이다. 아무도 반기지 않는 반찬이고 살아계실 때 엄마가 즐긴 음식도 아니었다. 엄마는 오징어나 갈치를 좋아했다. 피조개를 한 냄비씩 삶아서 먹는 것도 좋아했다. 그러니까 고기 산적이나 조기찜 대신 엄마가 좋아하던 음식을 올려 놓고 엄마를 추억해주면 진짜 엄마가 명절 제삿상에 다녀갈지도 모른다.



진짜 명절은 함께 기억하는 것



누군가를 함께 기억해주는 것 그것 하나면 족하지 않을까. 사정이 생겨 못오더라도 어쩔수없지만 그래도 모여서 둘러 앉아 가벼운 근황이라도 나누며 각자 살아가는 삶을 응원하고 격려해주면 족하지 않을까.


평소 자주 못 만나면 어색할 것 같지만 어린 시절 과자종합선물세트를 함께 사먹던 이야기를 하다보면 금세 재밌어진다. 새언니나 내 남편이 소외되지 않게 그분들 어린 시절 명절도 같이 듣고 말이다. 서로 자랑하는 이야기, 불편하게 만들거나 부담주는 질문은 빼고 말이다.


물론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풍경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질 거라는 순진한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나조차도 어릴 때 마을 서당에 다녔던 우리 아버지에게 제사를 없애자고 설득할 자신은 없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큰 부담 없는 정도로 상을 차려 엄마를 기억하자는 정도로 설득할 계획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엄마, 엄마의 명절이 생각난다. 엄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자세한 내막은 몰라도 얼마나 그곳에 있기 싫었으면 그랬겠는가. 그러나 그 투쟁 방식이 얼마나 작고 미약했는가.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왜 이제서야 왔냐고 엄마한테 떼 부리지 않을 건데, 우리 엄마 멋지다고 박수쳐줄 텐데...


그래, 엄마 생각이 이렇게 많이 나는 걸 보니 진짜 명절이 다가오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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