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게, 하나님께서 바로잡아 주시는 사람은 복이 있다네. _욥5:17
이보게, 하나님께서 바로잡아 주시는 사람은 복이 있다네.
1 "자네에게 대답할 사람이 있다면 지금 불러 보게. 거룩한 이들 가운데 누가 자네를 돌아보겠나? 2 분노는 어리석은 사람을 죽이고 질투는 바보 같은 사람을 죽인단 말이지. 3 어리석은 사람이 뿌리박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그 집이 갑자기 저주를 받더군. 4 그 자식들은 무사한 것과는 거리가 멀어서 성문 앞에서 짓눌리고 있는데도 구해 주는 사람이 없더군. 5 그들이 추수한 것은 배고픈 사람이 먹어 치우되 가시나무에서 난 것까지도 먹고 그 재산은 목마른 사람들이 집어삼킨다네. 6 어려움은 흙먼지에서 나는 게 아니고 고난은 땅에서 생겨나는 게 아니지. 7 그러나 불꽃이 위로만 솟듯이 사람은 고난받기 위해 태어나는 것일세. 8 나 같으면 하나님을 찾아서 하나님께 내 사정을 맡겼을 텐데. 9 그분은 크고도 헤아릴 수 없는 일을 하시고 기적을 셀 수 없이 보이시며 10 땅에 비를 내리시고 밭에 물을 대시며 11 낮은 사람들을 높은 곳에 세우시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안전한 곳으로 들어 올리신다네. 12 또 교활한 사람의 계략을 좌절시켜 그 손이 일을 이루지 못하게 하신다네. 13 지혜로운 사람들을 자기 꾀에 빠뜨리시고 간교한 사람의 계획이 뒤틀리게 하시네. 14 대낮에도 그들이 어둠을 맞닥뜨리니 정오에도 밤에 하듯이 더듬고 다닌다네. 15 그러나 그분은 궁핍한 사람들을 칼날과 같은 그들의 입에서 구해 내시고 힘 있는 사람들의 손아귀에서 구해 내신다네. 16 그렇기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이 있고 불의가 자기 입을 막는 것 아니겠나. 17 이보게, 하나님께서 바로잡아 주시는 사람은 복이 있다네. 그러니 전능하신 분의 훈계를 거절하지 말게. 18 그분은 상처를 주기도 하시지만 또 싸매 주기도 하시고, 다치게도 하시지만 그 손길이 또 치료도 하신다네. 19 그분이 여섯 재앙에서도 자네를 구해 내시고, 아니 일곱 재앙에서도 자네에게 아무 해도 끼치지 않게 하실 걸세. 20 기근 속에서도 그분은 자네를 죽음에서 구속하시고 전쟁에서도 칼의 권세로부터 자네를 구속하실 걸세. 21 자네는 혀의 채찍에서 보호받을 것이고 멸망이 닥칠 때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걸세. 22 자네는 멸망과 기근을 비웃을 것이고 땅의 짐승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걸세. 23 자네가 밭의 돌들과 언약을 맺고 들짐승들이 자네와 잘 어울려 지낼 테니 말이네. 24 자네는 자네 장막에 아무 탈이 없음을 알게 될 것이고, 자네 거처를 살펴보아도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음을 알게 될 걸세. 25 자네의 자손이 많아지고 자네의 후손이 땅의 풀처럼 될 것을 자네가 알게 될 걸세. 26 때가 되면 곡식 단을 모아들이듯이 자네가 수명이 다해서야 무덤으로 갈 것이네. 27 아, 그렇군. 우리가 고찰해 본 것이니 이 말이 맞을 걸세. 그러니 자네의 유익을 위해 그것을 알았으면 좋겠네." _욥5:1-27, 우리말성경
조명은 4장에 이어 계속 엘리바스를 비춘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제 연륜 있는 자의 확신이 더해진다. 그는 자신이 진리를 말하고 있으며, 욥에게 유일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는 듯한 태도로 말을 이어간다. 무대 연출은 관객이 엘리바스의 유창한 말과 함께, 그 말을 듣는 욥의 얼굴에 남아있는 약한 조명에 주목하도록 이끈다.
이 장면의 핵심은 엘리바스가 제시하는 '올바른 신학적 명제들'과 그것을 듣는 '욥의 실제적 고통' 사이의 어긋남이다. 엘리바스의 말은 하나하나 떼어놓고 보면 틀린 것이 없다. 하나님은 구원하시고, 싸매시며, 회복시키시는 분이다. 그러나 이 정답들이 고통의 당사자에게는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그의 말이 정교하고 희망찰수록, 욥의 표정은 위안이 아닌 오히려 더 깊은 고립감과 답답함을 드러낸다. 위로의 언어가 어떻게 한 인간을 소외시키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17 이보게, 하나님께서 바로잡아 주시는 사람은 복이 있다네. 그러니 전능하신 분의 훈계를 거절하지 말게.
욥은 지금 너무나 억울하고 궁금한데, 엘리바스는 그에게 의문을 품는 행위 자체가 잘못이라고 말한다. 그는 욥의 고난을 '하나님의 훈계'(5:17)로 단정하고,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니 그저 받아들이라고 충고한다. 결국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바로잡고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듣기에는 그럴듯한 결론을 제시한다.
엘리바스의 말은 그 자체로는 흠잡을 데 없는 신학적 진리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치료하시는 분이시고(5:18), 재앙에서 구해내시는 분이시며(5:19), 지켜주시고 형통케 하시는 분이시다(5:24-26). 그러나 어떤 말이 올바르게 쓰였는지를 보려면 그 말 자체의 옳고 그름보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의도로 사용되었는지가 더 중요하다. 엘리바스는 욥의 고통이라는 현실은 외면한 채, 자신이 가진 정답의 틀에 욥을 억지로 끼워 맞추려 한다. 그렇기에 그의 바른 말들은 욥의 상황에서는 공허한 공식일 뿐이며,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키는 '틀린' 말이 된다.
가장 큰 문제는 엘리바스가 욥의 상태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욥은 하나님을 떠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필사적으로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는 중이다. 자신이 그동안 알고 믿어왔던 하나님과 지금 자신을 대하시는 하나님이 너무나 다르기에, 그 혼란 속에서 관계의 끈을 놓지 않으려 발버둥 치고 있다. 엘리바스는 이 처절한 '관계적 씨름'을 '신앙적 불순종'으로 오해하고, 그에게 필요한 것이 정직한 질문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수용이라고 잘못 처방하고 있다.
어떤 말이 올바르게 쓰였는지를 보려면 그 말 자체의 옳고 그름보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의도로 쓰였는지가 관건이다. 바르지 못한 의도로 쓰인 바른 말이란 어불성설이다. 그런 말은 오히려 상대에게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고 오해를 낳아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 있다.
결국 이 논쟁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역설적인 사실이다. 하나님을 변호하는 것처럼 보이는 엘리바스는, 사실 '하나님은 이러이러해야만 한다'는 자신의 생각 속에 하나님을 가두고 있다. 반면 하나님께 항변하는 것처럼 보이는 욥은, 자신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불가해한 주권과 직접 대면하고 있다. 엘리바스의 하나님은 인간의 논리로 설명 가능한 '원리'에 가깝지만, 욥이 마주한 하나님은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허락하시는 '인격'이시다. 욥기는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참된 신앙이란 무엇인가'라는 더 깊은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욥은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는 중이다. 자신이 그동안 알고 있던 하나님과 지금 내게 임하신 하나님이 너무나 다르기에 혼란을 겪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사실 욥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아신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훈계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바르게 인도하는 분이시다. 그러나 그 훈계 방식은 우리의 생각과 다를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속에 갇혀있는 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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