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을 마무리하며
올해는 3년에 걸쳐 해야할 일들을 한 번에 겪었나 싶을 정도로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새 해 시작과 함께 개발자로서의 첫 커리어를 시작했고, 이를 발판 삼아 새로운 회사로 이직해 무사히 적응했으며, 그 와중에 결혼을 하고 비자를 받고 오랜만에 한국도 다녀왔다. 그리고 올해의 마지막 하이라이트인 내 집 마련과 새 집으로의 이사라는 목표까지 무사히 마쳤다. 이사 날짜를 전전긍긍 기다릴때만 해도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불안함과 지친 마음은 새 집으로 이사를 가기만 하면 해결될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토록 바랐던 새 집으로의 이사는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올해 세운 목표를 모두 이루고 나서의 현타가 진하게 찾아왔다. 올해 이룬 것들이 정말 만족할만한 것들이었나? 그냥저냥 대충 살아도 할 수 있는 일들은 아니었나? 좀 더 최선을 다할 순 없었나? 스스로에 대한 자기 검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존감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올해 많은 걸 했으니 남은 12월 동안은 조용히 재충전하는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마음먹었음에도 쉬면 쉴수록 마음은 불안했다. 과연 나는 이 회사에서 정말 성장하고 있는 걸까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의구심이 들고, 의욕만큼 실력이 느는 거 같지 않아 조금이라도 어려운 문제를 마주할때면 평소보다 훨씬 더 예민하게 반응하고 쉽게 좌절했다. 그 누구도 아닌 스스로가 나를 또다시 슬럼프의 구렁텅이로 밀어넣고 있다는 느낌에 괴로웠다.
다년간의 슬럼프 극복 경험을 통해 나에게는 두 가지의 슬럼프가 주기적으로 찾아온다는 걸 깨달았다. 하나는 정말 절대적으로 쉴 시간이 부족해 피로에서 오는 슬럼프, 나머지 하나는 내 안에 잔뜩 쌓인 에너지를 어떻게 생산적으로 써야 할지 몰라 방향을 잃었을 때 오는 슬럼프다. 후자의 슬럼프가 찾아왔을 땐 괜히 에너지를 쓸데없이 나의 내면을 향해 회초리를 휘두르는데 쓰지 않도록 나를 계속해서 바쁘게 만들어야 함을 이제는 안다. 다만 그 바쁨의 방향이 내 안의 불안을 해소해주는 정확한 해결책을 가리키도록 내가 지금 왜 불안한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처음엔 내가 마음만큼 빨리 승진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불안하고 조급한 줄 알았는데, 곰곰이 더 생각해보니 나를 지금 가장 괴롭게 하는 것은 회사 프로젝트를 벗어나고 나면 아무것도 혼자 만들어 낼 수 없을 것만 같다는 두려움이었다. 지금 회사에서 일하게 되면서 분명 거대한 프로젝트의 구조를 파악하고, 다른 사람의 코드를 읽고 이해하고, 테스트 코드를 탄탄히 짜서 더 안정적이고 생산성 있게 개발하는 방법론을 배운건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미 견고하게 개발된 라이브러리들과 자동화 코드들이 그 아래에서 실제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가리고 있는지라 만약 내가 이 조직을 벗어나게 되면 나는 과연 혼자서 프로젝트를 빌드할 수 있을까 점점 자신감이 없어졌다.
이 슬럼프를 벗어나기 위한 결론은 간단했다. 혼자서도 프로젝트를 빌드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것. 누군가가 정의해 준 기능이 아니라 백지부터 시작해 내가 직접 기능을 설계하고 코드로 구현하는 짜릿함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대략 뼈대만 잡아놓고 지지부진하게 쳐박아놨던 토이 프로젝트를 다시 시작했다.
내가 운영진으로 활동하고 있는 독서모임에서는 매주 운영진들이 참가자들의 리뷰를 현장에서 일일이 서기처럼 받아 적어 나중에 페이스북에 업로드하는 방식으로 운영 중이다, 그렇다 보니 정작 운영진들은 다른 사람의 말을 받아적느라 제대로 토론에 참가하지 못하는 게 항상 아쉬웠다. 그리고 모임장님이 엑셀에 수기로 각 멤버들의 참여 현황을 정리하고 있는데, 엑셀로 노가다를 하는 걸 보면 현기증이 나거등요..? 그래서 참가자들이 책 리뷰를 업로드하면 운영진이 날짜별로 한 번에 취합해 페이스북에 이를 공유할 수 있고, 리뷰 데이터를 기반으로 출결상황을 자동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독서모임 운영 툴을 만들어보고 있다. 예전에는 그저 무언가 만들어내느라 바빠서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npm 스크립트, linter 세팅 등 초기 프로젝트를 제대로 셋업하는 방법도 다시 연습하고, 런던 개발자 모임에서 만났던 시니어 개발자분과 2주마다 멘토링 세션을 진행해가며 부족한 부분에 대해 피드백받고 있다. SQL로 백엔드를 구성해보는건 처음이라 혼자 시작했다면 마냥 막막하기만 했을텐데 내가 경험치를 더 쌓고 싶었던 백엔드 부분에서 조언을 많이 얻을 수 있어서 넘 유익하고 중간중간 데드라인이 생기니 좀 더 텐션있게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 프로젝트에서 백엔드 지식을 탄탄히 쌓아서 다음 스텝은 좀 더 백엔드에 가까운 풀스택 롤로 옮겨가고 싶다.
그리고 얼마 전 브런치를 통해서 출간 제안을 받아서 내년 하반기쯤 프로그래밍 책을 출판할 예정이다. 처음엔 전공자도 아닌 내가 아직 고작 경력 1년차에 벌써 책을 써도 되나 고민했는데 내 브런치의 가장 빈도수 높은 유입 키워드가 비전공자 코딩 공부 관련된 것들이기도 하고, 구독자분들이나 주변 친구들로부터 코딩 공부 어떻게 해야 되냐고 질문받을 때면 '일단 뭔가를 만들어보라'라는 뭉뚱그려진 조언밖에 해줄 수가 없어서 항상 아쉬웠다. 아직 대강의 원고 기획서와 1장의 초안까지만 써 놓은 상태지만, 아마도 이 책을 통해 코드로 뭔가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대답을 해 줄 수 있게 될 것 같다. 내가 겪어본 프로그래밍에 익숙해지는 과정은 끊임없이 등장하는 담장을 계속 뛰어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눈앞에 놓인 벽이 처음엔 마냥 높아 보이기만 하지만, 한번 그걸 뛰어넘고 나면 새로 등장하는 새로운 담장을 두 번, 세 번 뛰어넘는 건 훨씬 쉬워지고 내가 생각하는 무엇이든 코드로 구현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수월하게 처음 담장을 맞닥뜨렸을 때의 막막함을 극복하고 프로그래밍의 세계에 발을 디딜 수 있도록 도움닫기 발판이 되어줄 수 있는 책, 입문자들이 드넓은 프로그래밍의 세계에서 표류하지 않고 제대로 방향을 조타해가며 멋진 항해를 할 수 있게 도와주는 책을 쓰고 싶다.
풀타임으로 일을 하면서, 두 가지 사이드 프로젝트를 동시에 다 잘 해낼 수 있을까 사실 자신이 없어서 많이 고민했다. 지금 내가 겪는 슬럼프는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잘하려고 발버둥 치느라 겪는 게 아니라 정말 잘하고 싶은 일을 더 잘하고 싶어서 겪는 것이기에, 노래 가사처럼 꿈만큼 이룰 거라는 말을 믿으며 매일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내보려 한다. 멘탈이 흔들릴때면 나 자신을 조금 더 친절하게 대해주고, 때때로 예고 없이 닥쳐오는 어려움들을 너무 비장하지 않게 마주하면서, 그저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담담하게 해야 할 일을 해내면 그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