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산티아고 기억과 인권 박물관
칠레 산티아고는 남미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의 수도답게 대도시를 여행할 때라면 으레 기대할 모든 것들을 훌륭히 갖춘 도시이다. 잘 정돈된 교통체계, 도시 곳곳에 숨어있는 멋진 카페와 바,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갤러리들과 박물관까지 여느 대도시와 견주어도 손색없을 만큼 살기 좋은 도시였다. 하지만 잠시 들러가는 여행자였던 내 눈에 비친 산티아고의 첫인상은 뭐 하나 빠질 것 없이 훌륭하지만 그렇다고 무엇 하나 특출 난 것이 없는 심심한 도시로 다가왔다. 그렇지만 우연히 찾아간 기억과 인권의 박물관에서 남미 여행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을 만났다.
기억과 인권 박물관(Museo de la Memoria y los Derechos Humanos)은 칠레 역사 상 가장 어두웠던 시기인 피노체트 군부독재 시대의 어두웠던 모습을 기록한 박물관이다. 피노체트는 세계 최초로 국민들의 민주적인 투표로 수립된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의 사회주의 정부를 무너트리고 17년간 칠레를 군부정권으로 유린한 독재자이다. 기억과 인권 박물관은 피노체트가 어떻게 살바도르 아옌데를 모네다 궁에서 끌어냈는지로 시작해, 그 후 저지른 군부독재의 참상을 상세한 사료와 실제 생존자들의 증언을 통해 생생히 기록해 놓았다.
쿠데타 후 7일간 3천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17년간의 독재기간 동안 고문의 피해를 입은 피해자는 수만 명 이상이며, 수많은 민주인사들은 조국을 떠나 세계 각지로 망명을 떠나야만 했다. 대부분의 사료가 스페인어로 되어있었고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일이었지만 그 아픔은 고스란히 나에게 전해졌다. 1층부터 3층까지 벽의 한 면을 가득 메운 피해자들의 사진은 5월 광주 기행에서 접했던 망월동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고 독재정권의 언론탄압, 인권유린, 폭력에 대항한 민중들의 모습은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잘못된 정치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그리고 그렇게 잘못 끼워진 역사의 단추가 남긴 상처까지도.
그들은 1993년에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되찾았다. 그 이후 이를 반성하고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전담기구를 만들어 사건을 기록하고 조사했으며 피해자를 돌보았고, 그 아픔을 잊지 않기 위해 기억과 인권의 박물관을 만들었다. 이렇게 한 시대의 아픔을 겪어낸 사람들의 흩어진 기억들을 모아 의미를 기릴 때 역사에 대한 진정한 추모와 애도가 완성되는 법이다.
기억과 인권 박물관을 나와 모네다 궁을 향해 정처 없이 걸었다. 지금은 쿠데타가 있었다는 걸 전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평화로운 모네다 궁 앞 광장에 멍하니 서서 괜히 엉엉 울고만 싶었다. 인간의 어리석음이란 어찌 이다지도 인류 보편적인지, 피노체트를 몰아냈더니 피노체트의 딸을 권좌에 앉혀 놓았던 우리 역사의 아이러니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땅에 자유와 인권을 되찾아 준 사람들에 대한 예의를 갖추기까지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하는지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불과 일 년여 남짓이 지난 지금, 피노체트의 딸은 감옥에 갔고 독재정권의 총칼에 희생당한 시민들의 이야기가 스크린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1년 전의 나는 산티아고 한가운데에서 마냥 답답하고 화가 났었지만 아픔의 역사와 빗나간 시간을 딛고 우리의 현실은 서서히 변화하고 있다. 하루하루의 변화는 느리지만 역사의 변화는 빨랐기에, 그리고 언제나 역사는 나선형으로 흐르기에 우리에게도 희망을 걸어본다. 그리고 지구 반대편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싸웠던 수많은 칠레인들의 용기에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