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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다 May 24. 2018

포르투에 뭐가 있는데요?

모르겠지만 일단 한번 가보겠습니다


지금 나는 파리 샤를 드골 공항 3 터미널 F30번 게이트 앞에 앉아있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내가 파리에 있을 줄 누가 알았나. 어쩌다 보니 나는 지금 서울을 떠나 대략 28시간째 포르투갈 포르투로 향하고 있다.


나는 언제 어디서부터 망가졌던 걸까

    교통사고를 당하는 순간에는 차가 달려오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움직일 수 없는 화이트 아웃 현상을 경험한다고 한다. 3월 초부터 나는 매일매일이 이런 기분이었다. 일상의 무게는 매일 예측할 수 없게 덮쳐오는데 도저히 무얼 더 해야 이 막막함을 이겨낼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됐다. 봄만 되면 겪는 슬럼프라고 치기에는 길었고 깊이도 깊었다. 뭐가 그렇게 힘드냐고 물으면 딱히 힘든 점을 짚어낼 수도 없었다. 긴 우울은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정신이 지치고 나니 아득바득 버텨주던 체력마저 바닥나기 시작했다. 업무 속도가 느린 걸 보충하려 야근을 더 해보기도 하고 주말에 출근해 더 나은 방향을 찬찬히 생각해보기도 했다. 갖고 싶었던걸 질러보기도 하고 공연을 보러 가기도 했지만 그때 잠깐만 기분이 좋아질 뿐 무엇을 해도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어지러웠고 슬퍼도 너무 지쳐 눈물조차 나지 않는 날들이었다.

그날 나의 심정은 대략 이러했다. 응 나 그냥 다 포기할래...

    새벽 네시 강변북로 위에서 그냥 이대로 택시 문을 열고 뛰어내리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던 날, 일단 모든 걸 멈춰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무엇도 해내지 못할 것 같다는 부정적인 생각도,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는 압박감도, 배려해주는 모든 이들을 실망시키고 있다는 자괴감도 모두 그냥 내려놓고 싶었다. 지금 모든 걸 내려놓으면 지금껏 내가 노력해온 모든 것들이 물거품이 된다는 것도, 포기하기엔 아직 너무 이르다는 것도 모두 알았다. 하지만 그게 다 웬걸 일단은 사람이 살고 싶은 의지가 들어야 미래도 있는 게 아닌가.


그리하여 떠나기로 했다

    회사에 가서 현재 내 상태에 대해 솔직히 말하고 퇴사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러운 변화는 좋지 않다며 일단 쉬고 생각해보라고 무려 8일의 연차를 주셨다. 내 인생에 또 이렇게 긴 휴가를 언제 받을 수 있을까 생각하니 일단 여행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엇도 해낼 수 없을 것 같다는 긴 자기혐오를 끝내려면 무언가 스스로 해냈다는 성취감을 느낄 계기가 필요했다.

    연차 결재가 나자마자 포르투갈 포르투로 떠나는 비행기표를 샀다. 동쪽 끝에서 서쪽 끝으로 날아가 일단 모든 걸 내려놓고 천천히 생각하기로 했다. 그곳에서 그냥 마음이 이끄는 대로 이것저것 하다 보면 내가 뭘 잘하는 사람이었는지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아무 계획 없이 일단 쉬다 보면 내가 뭘 하고 싶었던 사람이었는지 다시 기억해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한순간에 지금 내가 가진 문제의 해답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돌아가면 이 무책임했던 행동의 후폭풍을 견뎌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했다. 급작스러운 여행의 결론이 어떻게 될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간절했던 휴식의 시간을 일단은 누려보려 한다. 단 한 가지 원하는 게 있다면 길고 긴 자기혐오의 시간을 끝내고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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