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겠지만 일단 한번 가보겠습니다
지금 나는 파리 샤를 드골 공항 3 터미널 F30번 게이트 앞에 앉아있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내가 파리에 있을 줄 누가 알았나. 어쩌다 보니 나는 지금 서울을 떠나 대략 28시간째 포르투갈 포르투로 향하고 있다.
교통사고를 당하는 순간에는 차가 달려오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움직일 수 없는 화이트 아웃 현상을 경험한다고 한다. 3월 초부터 나는 매일매일이 이런 기분이었다. 일상의 무게는 매일 예측할 수 없게 덮쳐오는데 도저히 무얼 더 해야 이 막막함을 이겨낼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됐다. 봄만 되면 겪는 슬럼프라고 치기에는 길었고 깊이도 깊었다. 뭐가 그렇게 힘드냐고 물으면 딱히 힘든 점을 짚어낼 수도 없었다. 긴 우울은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정신이 지치고 나니 아득바득 버텨주던 체력마저 바닥나기 시작했다. 업무 속도가 느린 걸 보충하려 야근을 더 해보기도 하고 주말에 출근해 더 나은 방향을 찬찬히 생각해보기도 했다. 갖고 싶었던걸 질러보기도 하고 공연을 보러 가기도 했지만 그때 잠깐만 기분이 좋아질 뿐 무엇을 해도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어지러웠고 슬퍼도 너무 지쳐 눈물조차 나지 않는 날들이었다.
새벽 네시 강변북로 위에서 그냥 이대로 택시 문을 열고 뛰어내리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던 날, 일단 모든 걸 멈춰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무엇도 해내지 못할 것 같다는 부정적인 생각도,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는 압박감도, 배려해주는 모든 이들을 실망시키고 있다는 자괴감도 모두 그냥 내려놓고 싶었다. 지금 모든 걸 내려놓으면 지금껏 내가 노력해온 모든 것들이 물거품이 된다는 것도, 포기하기엔 아직 너무 이르다는 것도 모두 알았다. 하지만 그게 다 웬걸 일단은 사람이 살고 싶은 의지가 들어야 미래도 있는 게 아닌가.
회사에 가서 현재 내 상태에 대해 솔직히 말하고 퇴사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러운 변화는 좋지 않다며 일단 쉬고 생각해보라고 무려 8일의 연차를 주셨다. 내 인생에 또 이렇게 긴 휴가를 언제 받을 수 있을까 생각하니 일단 여행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엇도 해낼 수 없을 것 같다는 긴 자기혐오를 끝내려면 무언가 스스로 해냈다는 성취감을 느낄 계기가 필요했다.
연차 결재가 나자마자 포르투갈 포르투로 떠나는 비행기표를 샀다. 동쪽 끝에서 서쪽 끝으로 날아가 일단 모든 걸 내려놓고 천천히 생각하기로 했다. 그곳에서 그냥 마음이 이끄는 대로 이것저것 하다 보면 내가 뭘 잘하는 사람이었는지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아무 계획 없이 일단 쉬다 보면 내가 뭘 하고 싶었던 사람이었는지 다시 기억해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한순간에 지금 내가 가진 문제의 해답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돌아가면 이 무책임했던 행동의 후폭풍을 견뎌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했다. 급작스러운 여행의 결론이 어떻게 될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간절했던 휴식의 시간을 일단은 누려보려 한다. 단 한 가지 원하는 게 있다면 길고 긴 자기혐오의 시간을 끝내고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