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00 : 여기나 저기나 사는건 똑같아
아침에 지옥 같은 기분으로 일어나 4호선을 타고 한강을 건널 때면 눈 앞의 롯데 타워가 Gherkin타워 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처음 출근하던 날 눈 앞의 Gherkin 타워를 바라보며 출근하던 감동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런던에서의 삶도 어느새 벌써 일상이 되었다.
런던에서 살아가는 삶이란 상상했던 것처럼 낭만적이지만은 않다. 방 한 칸에 얹혀 사는데도 서울에서 혼자 살며 냈던 월세의 두 배를 내야 하고,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깨끗한 서울 지하철에 비교할 수도 없이 낡은 지하철을 타면서 세 배정도 비싼 교통비를 지불해야 한다. 지하철에서 핸드폰을 쓴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고 지상에서조차 툭하면 네트워크가 끊기거나 어마어마하게 느리다...(여기가 90년대입니까;) 여행자로 누렸던 무료 갤러리와 값싼 고퀄리티 공연은 영국 사람들이 감당하는 어마어마한 세율로 가능하다는 걸 여기서 월급을 받아보며 깨달았다. 런던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평생의 꿈이 현실이 되면 마냥 행복할 줄 알았는데, 막상 요즘은 일 년에 쓸 수 있는 에너지를 상반기에 다 몰아 써 버려서 지쳐버린 기분이다.
그래도 이 곳에서의 가장 큰 변화는 나의 모든 에너지를 단지 생존을 위해 쏟아붓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서울에서의 삶은 무얼 위해 이렇게 달리는지 생각할 여유조차 없는 숨 막히는 삶이었다. 아침에 눈떠서 새벽까지 일하다 택시 타고 집에 돌아와 침대에 쓰러지는 게 일상이었음에도, 항상 남들보다 더 빠르게 더 많이 해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일상에서 일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에 일을 제대로 못한다고 느낄 때면 존재 가치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사실 누구도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지만 남들에게 가치를 증명해 보이기 위해 스스로를 세상에서 가장 엄하게 다그쳐왔던 시간이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가면서 문득 한국시간을 봤더니 새벽 두 시였다. 불과 올해 초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이 시간에 퇴근하고 있었다는 걸 생각하니 헛웃음이 났다ㅋㅋ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게 되고 나서야 일만으로 나의 가치를 증명해 보일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삶은 회사 밖에서도 흘러가고 중요한 건 남들보다 더 빨리 달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인생을 지치지 않고 걸어가는 것이니까. 그래서 요즘 나의 모토는 '나를 세상에서 제일 소중하게 대해주자'는 것이다. 나의 열정도 집중력도 결국 이렇게 바닥까지 긁어 쓰다간 고갈돼버린다는 걸 알기에, 지치지 않고 꾸준히 내가 좋아하는 것에 매진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중이다.
나에게 남은 시간은 아직 많지만 먼 미래를 생각하자면 문득 불안하고 우울해진다. 그치만 아직 닥쳐오지도 않은 미래 때문에 현재를 불행하게 만드는 바보 같은 일은 하고 싶지 않다. 2년 뒤에 내가 어디에 있을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나는 평생 서울의 삶과 런던의 삶을 함께 그리워하며 살아갈 것이라는 점이다. 서울에 있다면 런던의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느렸던 여유를 그리워할 것이고, 런던에 있다면 모든 것이 미친듯이 빠르지만 심심할 틈 없던 서울의 삶을 그리워할 거다. 그러니 지금 내가 해야 하는 건 먼 훗날에도 떠올리고 싶을 만큼 행복한 기억을 만드는 것이다. 결국 내가 어디에 있든 행복은 스스로 찾으려 노력하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