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시리즈#7] 임병찬

복벽의 신념, 그리고 의병의 길

by Time Weaver

1. 향리의 아들, 근왕의 신념을 품다

임병찬 초상화_한국학중앙연구원.jpg <임병찬, 출처: 한국학 중앙연구원>

임병찬(1851~1916)은 전라북도 옥구에서 향리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17세에 옥구 형방이 되어 향리직을 시작했고, 낙안군수까지 올랐으나, 본질적으로는 조선 왕조와 대한제국의 질서를 수호하려는 강한 근왕주의(복벽) 신념을 품고 있었습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 지도자 김개남을 유인·체포해 관군에 넘겼고, 이후에도 왕실 중심의 국가 질서를 지키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여겼습니다. 이 때문에 오늘날 평가가 엇갈리기도 하지만, 임병찬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치열하게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임병찬은 한때 현실 도피와 은둔을 고민했으나, 곧 다시 국권 회복을 위한 행동에 나섰습니다. 그는 고종의 밀지를 받기 위해 여러 경로로 노력했고, 결국 의병 봉기를 결심하게 됩니다. 향리 출신이라는 한계와 신분적 벽에도 불구하고, 임병찬은 조선 왕조의 부흥을 위한 복벽운동에 일생을 바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2. 태인의병 봉기와 대마도 유배

대마도일기_.jpg <대마도일기, 출처: 독립기념관>

1906년 2월, 임병찬은 면암 최익현과 함께 전북 태인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을사늑약 이후 전라도에서 최초로 일어난 대규모 무장 항일투쟁이었으며, 임병찬은 의병대의 실무를 총괄하며 군자금 조달, 군사훈련, 조직 관리 등 핵심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는 최익현과 함께 전라도 각지의 유생과 농민, 의병 출신을 규합해 정읍, 곡성, 순창 등지에서 항전했습니다.


의병대는 국왕의 복위를 목표로 한 근왕·복벽의병이었으나, 봉기 직후 일본군과 관군의 강력한 탄압, 내부 배신, 무기·자금 부족 등으로 약 열흘 만에 해산되고 말았습니다. 임병찬을 비롯한 주요 지도부 13명은 체포되어 서울 일본군 사령부로 압송된 뒤, 일본 쓰시마섬(대마도)로 유배되었습니다. 유배 생활은 가혹했고, 최익현이 대마도에서 순국하는 모습을 임병찬이 직접 지켜보기도 했습니다. 1907년 석방되어 귀국한 임병찬은 은둔하지 않고, 의병운동의 실패를 교훈 삼아 조직적이고 비밀스러운 결사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됩니다.


귀국 후 임병찬은 태인의병의 실패를 통해 무장투쟁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절감했습니다. 그는 전국 각지의 유생·의병 출신과 연계하며, 조직적이고 비밀스러운 결사운동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 시기 임병찬은 종송리 일대에 영소전(공자 사당)과 흥학재(학당)를 세워 후진을 양성하고, 산중에 무기고·군사훈련장 등을 설치해 의병 재기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3. 독립의군부 결성과 복벽운동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임병찬은 고종의 밀지를 받고 1912년부터 전국적 비밀결사인 ‘독립의군부’ 결성에 나섰습니다. 독립의군부는 복벽주의(왕정 복위)를 내세운 대표적 항일운동 단체로, 임병찬은 전라남북도 순무대장에 임명되어 호남의 유생과 의병 출신을 규합하고, 아들 임응철을 서울로 보내 전국 조직망을 확대했습니다. 중앙에는 원수부와 참모부를 두고, 각 도·부·군 단위로 책임자를 임명하는 체계적 조직을 갖췄습니다.


독립의군부는 국권 회복과 일제 철병을 목표로, 무장투쟁뿐 아니라 국권반환 요구서(장서투서) 발송, 태극기 게양, 향약 실시 등 비폭력적이고 조직적인 저항운동도 전개했습니다. 1914년 5월 전국 360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투서 운동을 계획했으나, 동지의 체포로 조직이 발각되고 임병찬 역시 체포되어 거문도에 유배되었습니다. 그는 옥중에서도 국권회복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1916년 유배지에서 순국했습니다.


임병찬은 독립의군부의 실질적 지도자로서, 전국의 유림과 의병 출신 인사들을 규합해 조직을 확대했습니다. 그는 “우리의 힘으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신념 아래, 무력투쟁보다는 비폭력적이고 체계적인 저항을 중시했습니다. 독립의군부의 활동은 3·1운동 이전 국내 항일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이었으며, 임병찬의 복벽운동은 이후 만주로 이어진 독립운동 노선의 한 축이 되었습니다.




4. 임병찬의 흔적, 그리고 대표 유적지

임병찬 창의 기념비_문화유산포털.jpg <임병찬 창의 유적지의 기념비, 출처: 국가유산포털>

임병찬 의사의 독립운동 정신과 발자취는 오늘날 전라북도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 일대에 남아 있습니다. 이곳은 임병찬이 의병을 조직하고 훈련시키며, 항일운동을 준비했던 역사적 현장으로, 현재 ‘임병찬 창의유적지’(전라북도 기념물 제9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임병찬은 1893년 이곳에 공자를 모신 영소전(靈召殿)과 학당(흥학재)을 세우고 후진을 양성했으며, 산중에는 무기고와 탄약제작소, 숙영지 등을 설치해 의병들의 군사훈련을 실시했습니다. 1906년 최익현과 함께 태인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도 이곳을 근거지로 삼아 항일투쟁을 전개했습니다.


임병찬 창의유적지에는 현재 건물 터와 함께, 후손들이 세운 기념비, 안내판, 표석 등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임병찬이 직접 항일운동을 준비한 공간임을 알리는 안내판과, 의병들의 훈련장 및 숙영지로 사용된 산간 오지의 특성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 유적지는 임병찬이 동학농민군 지도자 김개남을 유인했던 역사적 현장이자, 태인의병 봉기의 거점이기도 합니다. 1914년 독립의군부 결성 이후에도 이 일대는 비밀 결사와 항일운동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이외에도 임병찬이 태어난 전북 군산시 옥구읍 상평리 생가 터, 일본 쓰시마섬(대마도) 유배지, 거문도 유배지 등도 그의 삶과 항일투쟁의 흔적이 남아 있는 장소입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항일운동의 중심지이자 대표 유적지는 정읍 종성리 창의유적지입니다. 이곳은 임병찬의 독립정신과 의병운동의 역사를 오늘에 전하는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지역사회와 후손, 연구자들이 지속적으로 보존·기념하고 있습니다.




[참고자료]

김종수, 「돈헌 임병찬의 생애와 복벽운동」, 『전북사학』 제44호, 2014

이성우, 「1910년대 독립의군부의 조직과 활동」, 『역사학보』 제224집,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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