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시리즈#8] 이상설

독립운동의 기반을 세운 선구

by Time Weaver

1. 진천의 아들, 시대의 지성으로 성장하다

이상설(李相卨, 1870~1917)은 충북 진천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총명함과 학문적 열정으로 주위를 놀라게 했습니다. 1894년 조선왕조 마지막 과거에 급제한 뒤 성균관 교수, 한성사범학교 교관 등으로 활동하며 신학문과 외국어에도 능통한 근대적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는 일찍부터 나라의 위기를 예감하고, 민족의 자주와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encykorea-이상설 생가.jpg <진천 이상설 생가, 출처: 공훈전자사료관>

1904년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맞서 논리 정연한 상소와 연설로 전국적인 반대운동을 이끌었고,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고종에게 오적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를 다섯 차례나 올렸습니다. 종로에서 민족항쟁을 촉구하는 연설 후 자결을 시도하기도 했으며, 대한협동회 회장으로 추대되어 항일운동의 중심에 섰습니다.


이상설은 관직 생활을 하면서도 신학문과 근대 사상, 외국어, 수학, 국제법 등 다양한 분야를 자습으로 익혔고, 동서양 학문을 겸비한 대학자로 평가받았습니다. 그의 학문적 깊이와 시대를 꿰뚫는 통찰력은 이후 독립운동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2. 망명과 교육, 독립운동의 토대를 닦다


1906년 이상설은 국권 회복을 위해 만주와 연해주로 망명했습니다. 북간도 용정촌에 이동녕 등과 함께 서전서숙을 설립해, 우리나라 최초의 민족교육기관이자 무상교육의 출발점을 마련했습니다. 그는 사재를 털어 학생들에게 책과 학용품을 제공하며, 항일 민족교육에 헌신했습니다. 이곳은 이후 만주와 연해주 일대 독립운동의 인재 양성소가 되었습니다.

<헤이그 특사 당시의 이상설(가운데), 출처: 국가보훈처>

1907년에는 고종의 밀지를 받고 이준, 이위종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되어, 한국의 독립을 국제사회에 호소했습니다. 비록 회의 참석은 좌절되었으나, 세계 언론을 통해 일제의 침략과 한국의 독립 의지를 널리 알렸습니다. 이때 일제는 이상설 등 특사단에 대해 궐석 재판을 진행해 사형을 선고했고, 이로 인해 그는 귀국하지 못하고 망명지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이상설은 미국에서도 한인 사회의 통합과 독립운동 조직화에 힘썼고, 애국동지 대표자 대회와 국민회 결성 등 미주 한인사회의 독립운동 역량을 결집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 시기 그의 활동은 독립운동의 국제적 연대와 조직적 기반을 다지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3. 연해주 독립운동 기지와 망명정부 수립


1909년 이상설은 연해주로 건너가 한인 이주민들과 함께 한흥동이라는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했습니다. 이곳에 한민학교, 밀산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 인재를 양성하고, 군사훈련과 민족교육을 병행했습니다. 1910년에는 유인석, 이범윤 등과 함께 13도의군을 편성해 국내 진공작전을 시도했으나, 일본과 러시아의 방해로 무산되었습니다.


1914년에는 이동휘, 이동녕 등과 함께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해 정통령에 선임되었습니다. 이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에 앞서 해외에서 조직된 최초의 망명정부로,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권업회, 신한혁명당 등 다양한 단체를 조직하며, 연해주와 만주, 미주 한인 사회를 아우르는 독립운동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이상설은 무장투쟁론을 실천하며, 독립군 양성과 조직적 항일운동의 기틀을 닦았습니다.


1915년 이후에는 신한혁명당 본부장으로서 상하이와 연해주를 오가며 독립운동의 통합과 국제 연대를 모색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의 탄압과 국제정세의 변화로 연해주 독립운동 기지는 점차 어려움에 봉착했고, 이상설은 동지들에게 “이제는 상하이로 내려가 조국 광복을 이루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이상설 유허비.jpg <우수리스크의 이상설 유허비, 출처: 우리문화신문?

1917년 3월, 연해주 우수리스크 송황령에서 48세의 나이로 순국했습니다. 그는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한 처지에 이 세상에 그 무슨 흔적을 남기겠는가?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고, 실제로 유해는 수이푼강에 뿌려졌습니다.




4. 이상설의 흔적, 그리고 대표 유적지


이상설의 삶과 정신은 오늘날 충청북도 진천군에 위치한 이상설 생가와 기념관에서 기려지고 있습니다. 생가는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의 생애와 독립운동 업적을 알리는 전시관, 사당(숭렬사) 등이 함께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이상설이 태어나고 성장한 공간으로, 해마다 다양한 추모행사와 교육 프로그램이 열립니다.

서전서숙터_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jpg <서전서숙, 출처: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또한, 만주 용정의 서전서숙 터, 연해주 한흥동 기지,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과 우수리스크의 유허비, 권업회와 대한광복군정부의 옛터 등도 이상설의 독립운동 기반 조성의 현장으로 남아 있습니다. 특히 우수리스크 수이푼강변에는 이상설의 유허비가 세워져 있으며, 이곳은 그가 순국한 뒤 유언에 따라 유해가 뿌려진 곳입니다. 이 유적지들은 오늘날에도 독립운동의 정신과 교육, 국제연대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소중한 역사 공간입니다.



[참고자료]

윤석병, 「이상설 선생의 생애와 독립운동」

이동길, 「연해주 이상설 선생의 유적 답사기」

박걸순, 「이회영과 이상설의 독립운동론과 독립운동 비교」

이경기, 「보재 이상설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서」

순국선열, 지하에서 울리는 소리 (34) 이상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독립운동가 시리즈#7] 임병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