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교를 다시 밝히다, 민족정신의 불꽃
나철(羅喆, 1863~1916)은 전남 보성군의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한학을 익혀 29세에 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올랐습니다. 러일전쟁 이후 일제의 내정 간섭이 심해지자, 그는 관직을 내려놓고 구국운동에 나섰습니다. 오기호, 이기 등과 함께 유신회, 자신회 같은 비밀결사를 조직해 국제사회에 한국의 상황을 알리고, 일본에 맞서 외교적 노력을 펼쳤으나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일제에 체포되어 유배까지 다녀왔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 나철은 을사오적 처단을 위한 암살 시도까지 감행했습니다. 거사는 여러 차례 계획되었으나, 결사대의 집결 실패와 동지들의 체포로 끝내 실행되지 못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동지 서창보가 고문 끝에 거사 전말을 실토하면서, 나철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이 차례로 체포되었습니다. 나철은 자발적으로 일제 수사기관에 출두해 1907년 7월 3일 평리원에서 10년 유형을 선고받고 전남 지도(智島)로 유배되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고종의 특사로 유배 4개월 만에 석방되었습니다.
유배에서 돌아온 뒤에도 나철은 “나라를 지키지 못한 죄인”이라는 마음으로 더 깊은 고민에 빠졌고, 국권 회복을 위한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됩니다. 그는 외교, 결사운동, 의혈투쟁 등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지만, 일제의 무력과 탄압 앞에서 한계를 절감했습니다. 이 시기 나철은 점차 “민족의 정신을 다시 세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구국의 길임을 깨닫게 됩니다.
1909년, 나철은 한성 재동 취운정에서 동지들과 함께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모시는 단군교(이후 대종교)를 창시했습니다. 이는 국권이 완전히 상실되기 전, 이미 민족정신의 쇠퇴를 위기로 인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종교는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우리 민족은 스스로의 힘과 정신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이후 만주와 연해주로 총본사를 옮기며, 대종교는 민족교육과 항일운동의 거점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대종교는 북간도 화룡현 청파호에 총본사를 두고, 민족교육과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김좌진, 서일, 이범석, 김구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대종교 신앙을 바탕으로 무장투쟁에 나섰고, 북로군정서와 청산리·봉오동 전투 등 항일운동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대종교는 민족정신의 부활과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일제는 이를 “독립운동의 본거지”로 보고 더욱 탄압했습니다.
1916년, 일제의 종교탄압이 극에 달하자 나철은 마지막 결단을 내립니다.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3일간 단식수도를 하며, “대종교와 민족, 인류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단순한 자결이 아니라, “나라가 망해도 정신은 살아있다”는 강렬한 메시지였습니다. 나철의 유해는 만주 화룡현 청파호 언덕에 안장되었고, 대종교에서는 이 날을 가경절로 기립니다. 그는 죽음 직전까지 허례허식 없는 장례, 검소한 삶, 민족의 얼을 지키라는 당부를 남겼으며, 그의 유서와 장례 방식은 오늘날에도 “진심이 담긴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듭니다
나철의 순명 이후, 대종교는 단순한 종교를 넘어 일제강점기 민족정신의 부활과 무장 독립투쟁의 구심점으로 자리잡았습니다. 대종교를 신앙의 뿌리로 삼은 수많은 인물들이 만주와 연해주, 국내외에서 항일운동의 선봉에 섰습니다.
특히 김좌진 장군은 대종교 신도로서 북로군정서 총사령관을 맡아 청산리 대첩을 이끌었고, 서일은 대종교 2대 교주이자 북로군정서 총재로서 독립군 조직과 지휘에 헌신했습니다. 이범석은 북로군정서 참모장으로 청산리·봉오동 전투의 실질적 전략가로 활약했으며, 신규식, 김규식, 김동삼, 김구 등도 대종교와 깊은 인연을 맺고 항일운동, 민족교육, 국학운동, 국문연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습니다.
대종교는 중광단, 대한정의단, 북로군정서 등 만주와 연해주 일대의 항일조직을 이끌며, 무장투쟁뿐 아니라 민족교육, 국학운동, 한글 연구 등 다양한 방식으로 독립운동의 토양을 만들었습니다. 대종교 신도들은 신앙을 바탕으로 공동체적 결속과 자기희생, 민족주체성 회복을 실천하며,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정신으로 다시 일어서는 민족”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들의 활약은 청산리·봉오동 전투의 승리, 임시정부의 탄생, 한글학자와 국학운동가들의 활동 등으로 이어지며, 대종교가 독립운동사의 뿌리 깊은 정신적 토대임을 증명했습니다.
나철의 삶과 정신은 오늘날 다양한 공간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전남 보성군 벌교읍 금곡마을에는 그의 생가와 홍암나철기념관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곳은 생가 복원, 사당(홍암사), 대종교 독립운동관, 전시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기념관에서는 나철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대종교를 중심으로 펼쳐진 독립운동의 역사가 다양한 전시와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소개되고 있습니다.
만주 길림성 화룡현 청파호 언덕에는 대종교 삼종사 묘역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곳에는 나철을 비롯해 김교헌, 서일 등 대종교를 이끈 세 지도자의 묘소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으며, 만주 독립운동의 거점이자 성지로 남아 있습니다. 또한, 나철이 순명한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는 단군신앙의 성지로, 조국과 민족, 인류를 위해 생을 마감한 현장입니다. 현재는 분단으로 인해 직접 방문이 어렵지만, 대종교와 독립운동의 역사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참고자료]
순국선열, 지하에서 울리는 소리 – 이달의 순국선열: 나철
허태근, 「홍암 나철의 조천과 유서 연구」, 『역사와 경계』 96, 2015
허태근, 「대종교 중광 전후 나철의 구국활동과 영향」, 『역사와 경계』 100,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