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시리즈#11] 신규식

사상과 실천, 한중 연대의 씨앗

by Time Weaver

Ⅰ부. 1910년대 – 망국의 충격, 저항의 씨앗


1. 충북 산동의 총명한 청년, 실업과 계몽의 길

신규식_국사편찬위원회.jpg <예관 신규식 선생의 생전 모습,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신규식(申圭植, 1879~1922)은 충북 문의에서 태어나, 신채호·신백우와 함께 ‘산동삼재’로 불릴 만큼 총명한 인물이었습니다. 한학과 신학문을 두루 익히며 성장했고, 관립한어학교와 육군무관학교를 거쳐 대한제국 장교가 되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아 의병을 일으키려 했으나 실패했고, 자결을 시도해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었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예관(睨觀)”이라는 자호를 쓰며, 자신의 상처를 민족의 아픔과 연결지었습니다.


군대 해산 후에는 고향에 협동학교를 세우고, 문동학원·덕남사숙 설립, 공업연구회와 공업계 발간, 황성광업주식회사 설립 등 실업과 교육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그는 “우리의 마음이 곧 대한의 혼”이라며, 민족정신과 실력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실업을 통한 국력 배양이 독립의 토대임을 확신하며, 경제적 자립과 민중 계몽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이 시기 신규식은 국내외 지식인들과 폭넓게 교류하며, 나라를 되살릴 실천적 방안을 모색하는 선구적 실업가이자 계몽운동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2. 망명과 신해혁명, 한중연대의 선구자

신규식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_독립기념관.jpg <신규식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출처: 독립기념관>

1911년 중국 신해혁명 소식을 듣고, 신규식은 누구보다 먼저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북경과 상하이, 남경 등지에서 손문, 진기미, 송교인, 황흥 등 중국 혁명가들과 교류하며 신해혁명에 외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참여한 인물로 기록됩니다. 그는 혁명파와의 연대를 바탕으로 신아동제사 등 한중연대 조직을 결성했고, 이 네트워크는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활동의 결정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동제사 창립 취지문_독립 기념관.jpg <동제사 창립 취지문, 출처: 독립 기념관>

상하이에서는 동제사, 신한청년당 등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청년 교육과 독립운동의 이론적·인적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신규식은 “한국의 독립은 중국혁명과 동아시아의 미래와 직결된다”고 보며, 한중 양국의 혁명적 연대를 적극적으로 실천했습니다. 그의 활동 덕분에 임시정부는 중국 혁명파와의 신뢰와 우정을 바탕으로 27년간 중국에서 활동할 수 있는 외교적·물적 기반을 갖출 수 있었습니다.


신규식은 중국 혁명가들과의 인연을 통해 한인 청년들을 중국 군관학교에 보내 독립군 인재를 양성했고, 중국 혁명파의 지원을 받아 임시정부의 외교적 생명줄을 마련했습니다. 이처럼 그는 한중연대의 선구자이자, 동아시아 민족해방운동의 가교 역할을 했습니다.




3. 임시정부의 주춧돌, 외교와 통합의 리더십


1917년 신규식은 ‘대동단결선언’을 주도해,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과 임시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 3·1운동 전후로는 동경 유학생 2·8독립선언, 국내 만세운동에 영향을 주었고,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총장, 1920년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에 선임되어 독립운동의 중심에 섰습니다.

신규식이 쑨원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한 편지_독립기념관.jpg <신규식이 쑨원에게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승인을 요청한 편지, 출처: 독립기념관>

1921년에는 임시정부 특사로 중국 광저우 호법정부에 파견되어 쑨원과 직접 교섭, 임시정부의 사실상 승인을 이끌어냈습니다. 이 과정에서 신규식이 쌓아온 한중 혁명가들과의 연대는 임시정부의 외교적 생명줄이 되었고, 이후 장제스 국민정부의 지원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임시정부 내 갈등과 분열에도 끝까지 통합과 단결을 호소하며, “독립운동은 사심 없는 봉사와 대동단결”임을 몸소 실천했습니다.


임시정부 내분과 재정난, 독립운동 세력의 분열에 깊이 상심한 신규식은 1922년 상하이에서 25일간 단식 끝에 43세로 순국했습니다. 그는 “마음이 죽으면 나라가 망한다”는 신념 아래, 마지막까지 민족의 혼과 단결을 호소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단순한 비극이 아니라, “우리의 혼을 지켜야 독립도 가능하다”는 정신적 유산을 남겼습니다.




4. 신규식의 흔적, 그리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공간과 의미


신규식의 삶과 독립운동 정신은 오늘날 다양한 공간과 역사적 유산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가 태어난 충북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산동리 일대는 ‘산동삼재’로 불릴 만큼 인재가 많았던 곳으로, 신규식의 성장과 초기 계몽운동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이곳에는 그의 생가와 기념비, 안내판 등이 남아 있어, 지역사회와 후손, 연구자들이 그의 뜻을 기리고 있습니다.


상하이와 베이징, 남경, 광저우 등 중국 각지에는 신규식의 발자취가 깊게 새겨져 있습니다. 상하이 프랑스 조계의 임시정부 청사, 동제사와 신한청년당이 활동했던 옛터, 그리고 임시정부 특사로 파견되어 쑨원을 만났던 광저우 호법정부 청사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 공간들은 신규식이 한중연대와 임시정부 외교의 주춧돌을 놓았던 현장으로, 오늘날에도 한중 양국의 역사적 교류와 우정을 상징합니다.


신규식이 설립에 참여한 협동학교, 문동학원, 덕남사숙 등은 일제강점기 실업구국운동과 민족교육의 산실이었습니다. 이 학교들은 당시 청년들에게 신학문과 실용학문, 민족의식을 심어주었고, 신규식의 실업·계몽운동 정신을 오늘까지 이어주고 있습니다. 또한, 신규식이 상하이에서 창간한 잡지 『진단(震壇)』, 『공업계』 등은 독립운동의 이론적·실천적 토대를 넓힌 소중한 기록물로 남아 있습니다.


그의 순국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신규식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습니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독립기념관, 충북 청주 문의면 등지에서는 신규식의 생애와 업적을 알리는 전시와 교육, 추모사업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의 유산은 단지 한 인물의 역사를 넘어, 실업구국·한중연대·임시정부 외교·통합의 리더십 등 오늘날에도 유효한 독립운동의 가치와 실천의 본보기로 남아 있습니다.


신규식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이 공간들은, 우리에게 “분열을 넘어 연대와 실천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며, 독립운동의 정신과 역사를 오늘에 되살리는 살아 있는 현장입니다.



[참고자료]

순국선열, 지하에서 울리는 소리 – 이달의 순국선열: 신규식

양지선, 「예관 신규식과 중국혁명파의 연대활동에 대한 재고」, 『동양학』 95집, 2024

유지혜, 「한말 신규식의 실업 활동 양상과 의미」, 『서울과 역사』 114호,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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