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시리즈#12] 안창호

실력양성과 흥사단, 민족의 스승

by Time Weaver

Ⅰ부. 1910년대 – 망국의 충격, 저항의 씨앗


1. 안창호, 실력양성의 길을 걷다

안창호2_독립기념관.jpg <공립협회 총회장 당시의 안창호(1905), 출처: 독립기념관>

안창호(安昌浩, 1878~1938)는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나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성장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정의감과 책임감이 남달랐던 그는, “나라를 살릴 힘은 국민의 실력에 있다”는 신념을 일찍 품었습니다. 1897년 독립협회 활동을 시작하며 계몽운동에 뛰어든 그는, 조국의 힘이 국민의 실력에서 나온다는 신념을 품게 됩니다. 당시 조선사회는 신교육과 계몽의 필요성이 절실했고, 안창호는 “국민이 깨어나야 나라가 산다”는 믿음으로 교육운동에 헌신했습니다.


1902년, 서양의 문명과 민주주의, 실용적 지식을 배우기 위해 아내와 함께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습니다. 그곳에서 한인공동회와 공립협회(후에 대한인국민회) 설립에 참여하며, 미주 한인 이민사회에서 민족의식과 자립정신을 심어주었습니다. 오렌지 농장에서 직접 일하며 “오렌지 하나도 정성껏 따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길”임을 실천했고,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를 이끌며 한인 공동체의 자치와 민주주의를 실험했습니다.


1907년 귀국한 안창호는 신민회 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1908년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했습니다. 대성학교는 신학문, 근대적 시민의식, 민족정신, 자립정신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으로,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계몽운동가를 배출하며 평양과 북부지역 계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2. 실력양성과 흥사단 창립


안창호와 흥사단 단원들(앞줄 왼쪽에서 세번재가 안창호)_독립기념관.jpg <안창호와 흥사단 단원들(앞줄 왼쪽에서 세번재가 안창호), 출처: 독립기념관>

일제의 탄압 등으로 국내 활동이 위기에 처하자, 안창호는 더 넓은 시야와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직후 연해주로 망명해 독립운동 기지 개척에 힘썼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한인공동회와 대한인국민회, 흥사단 창립에 나섰습니다. 191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창립한 그는 “진실·정의·용기”를 바탕으로 인격수양과 민족교육, 조직적 독립운동의 길을 열었습니다.


흥사단은 국내외 한인 청년들에게 민족정신과 실천적 리더십을 가르치는 학교이자, 독립운동 인재 양성소였습니다. 안창호는 “나라의 독립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며, 실력양성·교육·산업·도덕의 기초 위에 독립의 꿈을 설계했습니다. 신민회, 대한인국민회 등 다양한 조직을 통해 계몽, 교육, 산업 진흥, 공동체 건설에 힘썼고, 실력양성론자로만 평가되지만 실제로는 무장투쟁·외교·의열투쟁 등 다양한 노선과의 연대와 통합을 중시하는 리더십을 보여주었습니다.

안창호와 대한인국민회 멕시코 지방회 지도자들(1918)_독립기념관.jpg <안창호와 대한인국민회 멕시코 지방회 지도자들(1918), 출처: 독립기념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안창호는 미국에서 곧바로 상하이로 이동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습니다. 그는 임시정부 내무총장·국무총리 대리 등 핵심 역할을 맡으며,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과 민족지도자 양성에 힘썼습니다.




3. 임시정부, 통합의 리더십과 유산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총장겸 국무총리 대리로 활양할 당시의 안창호_독립기념관.jpg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총장겸 국무총리 대리로 활양할 당시의 안창호, 춮처: 독립기념관>

안창호는 임시정부 내 갈등과 분열에도 “대동단결”과 “무실역행”의 정신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나 하나의 성공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성장하고 깨어나야 진정한 독립이 온다”고 믿었습니다. 상해임정에서는 내무총장·국무총리 대리로 활동하며, 각 지역·계파 지도자들과 청년 차장들을 아우르는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했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머리가 되려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섬기러 왔습니다”라는 그의 연설은, 권력욕이 없는 헌신적 지도자의 상징이었습니다.


일제의 탄압으로 수차례 투옥과 고문을 당했지만, 끝까지 “실력양성”과 “도덕적 민족운동”을 외쳤습니다. 1938년 옥고 끝에 병세가 악화되어 순국한 뒤, 그의 유언은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끝까지 진실하게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안창호의 삶과 정신은 흥사단, 대성학교, 대한인국민회 등 다양한 단체와 교육·문화·사회운동의 뿌리가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대전감옥에서 출감하는 안ㅊ창호와 마중나온 여운형이 함께 찍은 사진_독립기념관.jpg <대전감옥에서 출감하는 안창호와 마중나온 여운형이 함께 찍은 사진, 출처: 독립기념관>

그의 리더십은 대공주의(大公主義)라는 사상에 뿌리를 두고, “개인보다 민족과 국가, 진리와 정의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는 단체와 조직을 통해 목표를 달성하고, 스스로 인격 수양과 실천을 중시하는 모범적 지도자였습니다.

안창호 수형기록표(1932)_독립기념관.jpg <안창호 수형기록표(1932), 출처: 독립기념관>


4. 안창호의 흔적, 그리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공간


안창호의 삶과 정신은 오늘날 다양한 공간과 유산 속에 남아 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에는 그가 세운 미주 최초의 코리아타운 ‘파차파 캠프’와 도산 안창호 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한인 이민사회와 공동체 자치, 민주주의 실험의 산실이었으며, 오렌지 농장에서 일하는 도산의 모습은 “노동과 실천이 곧 독립운동”임을 보여줍니다.

도산안창호기념관_지역N문화.jpg <도산 안창호 기념관, 출처: 지역N문화>

국내에는 서울 남산의 도산공원과 도산 안창호 기념관, 평양의 대성학교 터, 그리고 흥사단 본부 등이 그의 발자취를 전하고 있습니다.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는 안창호가 내무총장·국무총리 대리로 활동하며 임시정부의 기틀을 다진 공간으로, 현재는 기념관과 전시관으로 보존되어 많은 이들에게 독립운동의 역사를 전합니다.


안창호의 유산은 단지 한 인물의 역사를 넘어, 실력양성·민족계몽·연대와 통합의 실천, 그리고 “진실·정의·용기”의 정신으로 오늘날에도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그의 삶은 “분열을 넘어 연대와 실천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남깁니다.



[참고자료]

손호철, 「미국사 뒤집어보기 – 안창호가 세운 미주 최초의 코리아타운」

장세윤, 「안창호의 독립운동 방략과 실력양성론」, 『동아시아역사연구소』, 2025

황수영, 「도산 안창호의 리더십에 관한 연구 – 대공사상을 중심으로 –」, 『대동철학』, 2022

신명호, 「상해임정 27년사 – 도산 안창호, 상해임정의 청년 내각을 출범시키다」, 『월간중앙』,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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