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을 지킨 역사학자, 독립운동의 사상가
박은식은 1859년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유학을 수학하고 과거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지만, 그는 전통 관직의 길 대신 격동의 시대에 응답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대한제국기에는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에서 논설을 쓰며 애국계몽운동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습니다. 그는 신문을 통해 일본의 침략 의도를 경고하고, 민권의식과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 박은식은 학교 설립과 민족 교육에도 힘을 쏟았습니다. 그는 대동학교 교장을 맡아 민족주의 교육을 실천했고, 신학문을 통해 새로운 인재를 길러내려 했습니다. 이 시기 박은식은 종교에도 관심을 갖고 천도교에 입교하여 민족종교의 사상적 기반과도 연결되며 활동의 폭을 넓혀갔습니다.
점차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자 박은식은 직접적인 언론 활동과 교육 현장에서 벗어나, 보다 근본적인 민족의 정신적 기반을 정리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그는 역사를 통해 조선 민족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고자 했습니다.
1910년 일제의 강제 병합 이후, 박은식은 ‘국권’ 상실보다 더 무서운 것이 ‘민족혼’의 붕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민족의 혼이 사라지면 나라는 다시 일어설 수 없다고 확신했고, 이를 되살리기 위한 방법으로 역사 집필을 선택했습니다. 단순한 기록이 아닌, 정신을 되살리는 행위로서의 역사였습니다.
1915년 그는 『한국통사』를 편찬하였습니다. 이 책은 개항 이후 망국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민족 중심의 시각으로 서술하며, 일본의 침략성과 내부의 분열을 비판적으로 조명했습니다. 이어서 1920년에는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출간하였는데, 이 책은 3·1운동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피 흘린 무명의 독립운동가들을 기록한 민족의 ‘피의 역사’였습니다.
박은식은 역사란 민족의 거울이며, 과거의 진실을 외면할 때 미래도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의 역사관은 단지 과거를 정리하는 작업이 아니라, 독립정신을 각성시키는 투쟁이었습니다. 그의 역사학은 후일 신채호의 낭가사관과 함께 식민사관에 맞서는 중심축이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한국사학의 중요한 유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1911년, 박은식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피해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습니다. 당시 상하이는 다양한 독립운동 세력이 활동하는 공간이자 국제 정세의 교차점이었기에, 망명지이자 활동 무대로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박은식은 낯선 땅에서도 곧바로 집필을 재개하며, 글을 통해 조국의 현실을 알리고자 했습니다. 『신대한』을 비롯한 매체 활동은 그의 사상과 문제의식을 전파하는 도구였습니다.
그는 단지 책상 앞에만 앉아 있지 않았습니다. 상하이와 항저우, 베이징 등을 오가며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했고, 항일운동의 방향과 전략을 함께 고민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초기에는 외교문서 작성과 통신 연락, 이념 조정 등 실무를 맡으며 실질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무장 투쟁과 외교 노선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독립운동의 중심을 잡아주려 했습니다.
교육의 중요성 또한 잊지 않았습니다. 박은식은 조선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열고, 민족학교 설립에도 조언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독립운동이 단절되지 않도록 세대를 잇는 일에도 힘을 쏟았습니다. 망명지에서의 그의 활동은 단순한 피신이 아니라, 또 하나의 독립운동 전선이었습니다.
1925년, 박은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으로 선출됩니다. 당시 임정은 독립운동 노선의 분열과 외교 실패로 큰 어려움에 처해 있었고, 박은식은 이를 '정신의 복원'으로 극복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행정가라기보다 사상가이자 통합의 상징으로서 대통령직을 수행했습니다.
그는 민주공화제의 기반을 지키려 했고, 내부 갈등을 줄이기 위해 임정의 기본이념과 방향을 문서화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갈등은 쉽게 봉합되지 않았고, 무장투쟁 노선과 외교 독립 노선을 둘러싼 내부 대립은 계속되었습니다. 박은식은 이념적 통합의 한계를 실감하며 대통령직에서 물러났고, 이후에는 사상적 지원자로서 역할을 이어갔습니다. 직접적인 지도력보다는 공동체의 정신을 지켜내는 지도자의 역할을 자임한 것이었습니다.
1927년, 그는 중국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당시 병환으로 오랫동안 건강이 좋지 않았으며, 망명지에서의 열악한 환경과 지속된 독립운동 활동으로 인해 병세가 악화된 끝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육신은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지만, 그의 역사관과 사상은 오늘날까지 살아 있습니다. 박은식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혼은 지금 깨어 있는가?"
[참고자료]
박찬승, 「박은식의 역사관과 민족의식」, 『한국사연구』 제127호, 2004
한국근현대사학회 편, 『한국근대사와 민족주의』, 선인, 2007
박찬승, 「박은식의 역사관과 민족의식」, 『한국사연구』 제127호,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