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시리즈#4] 손병희 – 민족을 깨우고 하늘

by Time Weaver



1. 유년기와 동학의 길 - 제3대 교주가 되기까지

2022062209291601.JPG <청주 손병희 생가, 출처: 국가유산포털>


가족사진.jpg <가족사진, 출처: 근현대사기념관>

손병희는 1861년 충청북도 청원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학문에 열중했던 그는 유학을 공부하며 성리학의 기초를 익혔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문제의식은 단지 글공부에만 머물지 않았고, 조선 후기의 사회 모순과 민중의 고통을 직접 체험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됩니다.


1890년대 초, 그는 최시형이 이끄는 동학에 입도하면서 민중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당시 동학은 단지 종교가 아닌, 삶을 바꾸는 운동이었으며, 손병희는 그 사상에 깊이 매료되었습니다. 그는 동학 2세 교주 최시형의 신임을 받으며 핵심 후계자로 성장했고, 충청 일대를 중심으로 교세 확장에 기여하였습니다.


1898년 최시형이 순도한 이후, 동학 내부에서는 차기 교주 선출을 두고 분열이 발생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손병희는 교단의 대다수 지지를 받아 제3대 교주로 추대되었고, 이를 계기로 교단 재정비에 나섰습니다. 이후 그는 동학을 보다 체계적이고 근대적인 조직으로 바꾸려는 움직임을 본격화하며, 민족종교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기반을 다지게 됩니다.




2. 동학에서 천도교로 – 민족종교의 길을 열다 (일진회와의 갈등 포함)


일본-망명-시절-교류한-인사들과-함께.jpg <일본 망명 시절 교류한 인사들과 함께, 출처: 근현대사기념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좌절된 뒤, 손병희는 일본으로 건너가 서양의 문명과 종교, 정치 제도를 살피며 새로운 길을 모색했습니다. 그는 조선으로 돌아와 무너진 동학 교단의 재건을 시도하였고, 이를 위해 기존 동학의 교리와 조직을 정비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동학 내부에서는 일본의 힘을 빌려 교단을 유지하려는 일부 세력, 특히 일진회와 같은 친일 단체가 등장하였고, 그들은 동학의 이름으로 권력을 도모하려 하였습니다.


손병희는 이러한 친일 세력과의 이념적 충돌 끝에 단호하게 결별하였고,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종교 노선을 새롭게 세워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종교의 정체성과 교단의 주도권을 되찾았습니다. 천도교는 인내천 사상을 중심으로 민족 자존과 계몽을 강조하는 새로운 민족 종교로 거듭났습니다.


손병희는 천도교를 단순한 종교 조직이 아닌, 민족을 위한 계몽 운동체로 전환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는 종교 내부의 친일적 흐름을 청산하고, 자주정신을 중심으로 새로운 사상 체계를 구축해갔습니다. 이러한 개혁은 종교를 넘어선 실천 운동이 되었고, 천도교는 이후 교육, 출판, 조직 운동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민중의 의식을 일깨우는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그가 내세운 중심 사상은 “사람이 곧 하늘이다(인내천)”였습니다. 이는 모든 인간이 존엄하며, 깨어나야 할 존재라는 의미였습니다. 손병희는 『만세보』를 창간하고, 보성학교와 동덕여학교를 설립하여 계몽 운동에 나섰습니다. 천도교는 전국적으로 빠르게 세를 확장하며, 일제강점기 최대의 민족 종교로 자리 잡게 됩니다.


천도교는 종교적 신앙을 넘어서 민중 계몽과 실천의 영역으로까지 활동을 넓혔습니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 억눌렸던 하층민과 여성, 청년들에게 천도교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사상적 기반이었습니다. 손병희는 종교 지도자이자 사회 개혁가로서 시대를 앞서간 사람이었습니다.




3. 3·1운동의 기획자 – 조용한 혁명의 중심


3.1독립선언서.jpg <3·1 독립선언서, 출처: 근현대사기념관>·

1910년 조선이 일본에 강제 병합된 뒤, 손병희는 점점 조직적인 독립운동의 가능성을 타진합니다. 특히 그는 종교계와 교육계 인사들과 함께 독립선언을 준비하며, 천도교가 중심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다졌습니다. 그 결과, 1919년 3월 1일, 그는 민족대표 33인의 대표 격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습니다.


천도교는 3·1운동의 기획과 실행에 깊숙이 관여하였습니다. 천도교 청년회는 선언문 인쇄, 배포, 시위 조직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이는 종교 조직이 독립운동의 실질적 주체로 자리 잡은 대표적인 사례였습니다. 다른 종교들과도 연대하여 민족 단합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도 손병희의 역할은 결정적이었습니다.


손병희는 시위 직후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병세가 악화된 끝에 1922년 순국하였습니다. 서대문형무소 근처 천도교 묘역에 묻힌 그의 흔적은 지금도 조용히 남아 있습니다. 그는 말보다 실천으로 민족운동을 이끌었던 지도자였습니다.




4. 새로운 나라를 꿈꾸다 – 공화정의 이상


손병희는 단순히 항일운동을 펼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왕정의 시대를 넘어, 국민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체제를 꿈꿨습니다. 재판정에서 그는 “조선이 독립한다면 반드시 민주공화정이 되어야 한다”고 증언했으며, 천도교의 기본 교리 속에는 만민평등과 자주자치의 정신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가 구상한 국가는 단지 외세로부터의 해방을 넘어서, 사회적 불평등과 권위주의를 극복하는 민본적 질서를 지향했습니다. 이는 단지 정치 체제의 전환이 아니라, 사람의 존엄을 바탕으로 한 사회를 세우려는 실천적 이념이었습니다.


그의 공화정 이상은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초가 되었으며, 오늘날 민주주의의 가치와도 연결됩니다. 손병희의 정치 사상은 그 시대를 넘어 현대적 가치로 재해석될 수 있는 유산입니다.




5. 천도교, 민족운동의 뿌리가 되다

독사진.jpg <손병희, 출처: 근현대사기념관>

손병희의 지도 아래 천도교는 단순한 종교 집단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조직력, 사상, 대중성과 실천력을 모두 갖춘 민족운동의 중심이었습니다. 만세운동뿐 아니라 교육운동과 출판운동, 생활 속 실천을 통해 천도교는 일제의 식민통치에 맞서는 비폭력 저항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 천도교는 유일하게 전국적 네트워크를 가진 조직으로서, 민족 단결의 구심점이 될 수 있었습니다. 손병희는 이를 기반으로 독립운동을 대중적 차원으로 확장시켰으며, 지식인과 민중, 종교와 정치의 경계를 넘어선 활동을 실현하였습니다.


그가 세운 사상과 조직은 손병희 사후에도 이어졌고, 일제강점기 내내 천도교는 민족정신의 한 축을 담당했습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말은 단지 믿음이 아닌,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행동 지침이었습니다. 손병희는 그렇게, 민족을 깨우고 하늘을 다시 연 사람이었습니다.



[참고자료]

임형진, 「의암 손병희의 독립국가사상 - 동학혁명에서 3·1혁명으로」, 『동학학보』 제62호, 2022

박현수, 「갑오년 이후 의암 손병희의 민족운동론과 국가 인식」, 『한국사연구』, 2013

김삼웅, 『의암 손병희 평전』, 채륜,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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