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 까지 축구 중계를 본탓인지 아들이 늦게 일어났고 어차피 오전에 나가기는 힘들겠구나 생각했는데 동작이 빠른 아들은 순식간에 세면을 끝내고 11시경 숙소를 나설 수 있었다. 원래 빠르기도 했지만 힘들다는 백골 부대에서 군 복무를 마친 후 더욱 행동이 민첩해진 느낌이다.
미리 내가 굳건히 다짐을 하고 온 탓인지 아침에 아들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처음에는 힘들더니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는지 익숙해졌다. 사실 생각하기 나름인 것이 원래는 아들 혼자의 여행으로 계획되어졌던 것이니 당연히 아들 맘대로 당일 계획을 짤 수 있는 것이지 않는가? 오히려 아들도 나 때문에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니 짜증 나기는커녕 미안한 마음까지 드는 것이었다. 내가 없었으면 아들은 아마도 오전 일정을 쉴 수도 있었을 텐데… 같은 현상을 두고 우리 마음먹기 나름으로 전혀 다른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이번 여행 내내 내가 다짐했던 단 하나 ‘아들을 노엽게 하지 말자’를지금까지 잘 지키고 있었다.
그랑비아 전철역까지 나와서 그곳에 있는 이제는 우리의 마드리드 여행의 전초기지가 되어버린 Pan&Company에서 brunch를 먹으면서 아들과 오늘 여행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이 곳은 우리뿐만이 아니고 많은 여행객들이 brunch를 먹으면서 여행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장소가 되어 버렸고 그중에는 한국 여학생들도 눈에 띄었다.
일단 솔 광장으로 이동했는데 이곳이 마드리드에서 거리를 재는 기준점이 되는 곳이라 한다. 이곳에서 10개의 도로가 뻗어나간다. 1808년에는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에 맞서서 스페인 사람들의 저항이 있었던 역사적인 현장이다. 5년 전과 달리 공사를 하고 있었고 원래 광장 주변에는 식당이나 기념품 가게들이 많아서 번잡하기만 하고 볼 것도 없고 앉아 있을 그늘도 없었다.
바로 시벨레스 광장으로 이동했다. 당연히 이제는 너무 익숙해진 도보로. 솔 광장에서 동쪽으로 걸어가면 시벨레스 광장이 나오는데 이 길이 알칼라 거리이다. 그랑비아 거리만큼 널찍한 길이다. 이런 길의 모습도 어딘가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는 같은 듯하면서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시벨레스 광장에 도착하면 너무 멋진 건물이 눈길을 사로잡는데 중앙우체국 건물이다. 처음 보았을 때에는 또 다른 왕궁인 줄 알았다. 그만큼 웅장화고 화려한 건물이었다.
이날 이 중앙우체국 앞에서는 시위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미리 경찰에 사전 승인을 받은 집회인지 경찰이 주변을 둘러싸고 지켜보기만 했다. 무언가 심각한 사안이 있는지 상당히 격앙된 어조로 성토하는 분위기였다. 내가 전혀 스페인 말을 모르는 관계로 무슨 내용인지는 전혀 몰랐고, 주변에도 많은 관광객들이 모여서 구경하고 있는데 내용은 모르는 분위기였다.
시벨레스 광장은 중앙 분수와‘대지와 풍요의 여신’인 시벨레스 조각이 있는 곳이다.
이 광장 역시 마드리드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아름다운 광장이다.
이 시벨레스 광장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틀어서 남쪽으로 내려가니 갑자기 도심 한가운데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넓은 녹지 공간이 나왔다. 뉴욕의 센트럴 파크처럼 엄청 크지는 않아도 상당한 규모였고 이곳에 들어가면 큰 아름드리나무들이 촘촘히 있어서 잎사귀들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태양을 완전히 차단한 관계로 방금 전까지 내륙 지방의 뜨거운 햇살과 달구어진 도로에서 올라오는 복사열로 지쳐있던 우리에게 거짓말 같은 시원함을 선사하였다. 마치이 곳을 경계로 여름과 가을이 공존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도 꽤 있었으나 워낙 넓고 항상 이야기하듯이 벤치들이 많이 잘 조성되어 있어서 아들과 나는 잠시 앉아서 재충전할 수 있었다. 말이 잠시지 상당히 오랜 시간 앉아 있었던 것 같다. 그만큼 우리가 그랑비아 전철역에서 이곳까지 걸어오느라 지쳐있기도 했지만 이곳이 도심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맑고 신선한 공기와 바람까지도 선선한 시원함이 있어서 아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꽤 시간이 흘러갔다. 우리나라의 여행이 멀리 외국까지 와서 투입한 시간과 돈이 아까와서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하나라도 더 보려고 앞만 보고 달려가는데, 여행 도중 이런 망중한을 즐길 수 있다는 것 역시 중요한 여행의 과정이라 생각한다. 지금도 웬만한 성당보다는 이 공원이 내 기억에 또렷이 남아있는 것 보면 참 인상적인 장소였던 것 같다.
계속 남쪽으로 내려오다 세계 3대 미술관 중의 하나인 프라도 미술관에 도착했다. 5년 전에 비해 훨씬 많은 인파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아들이 얼른 가서 알아보고 오더니 입장료가 14유로씩이라고 한다. 단 토요일과 일요일 저녁에는 무료라고 하면서 오늘이 금요일이니 내일이나 모레 저녁에 오자고 한다. 미술관에 별로 취미가 없는 아들이라 당연히 이런 의견이 나올 줄 알았고 나는 5년 전에 한번 관람을 했기 때문에 미련 없이 돌아섰다.
남쪽으로 더 가면 식물원이 나오고 또 다른 광장에 도착하는데 이곳이 카를로스 5세 광장이다. 좌회전해서 더 동쪽으로 가면 바로 레티로 공원이 나온다. 5년 전에도 인상적인 장소였기에 들어가 보자고 했고 아들도 흔쾌히 동의했다.
이 레티로 공원은 첫날 가본 왕궁만큼 나한테는 멋진 곳이었는데 이곳 역시 펠리페 2세가 세운 궁전의 정원이었다고 한다(1630년). 프랑스 독립전쟁 때 궁전은 소실되었고 현재는 몇 개의 건물만이 남아있다. 1868년에 이사벨라 2세가 시민들에게 공원으로 개방하였다고 하는데, 아마도 카스티야 왕국의 궁전이 내 취향과 딱 맞는 가 보다. 왕궁만큼 널찍하고 화려했다.
장미원의 장미는 시들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아름다웠고, 근처의 수정궁은 너무 화려하고 온실(아주 거대하고 화려한)을 연상시켰다. 안으로 들어갔다가 못 견디고 바로 나왔다. 겨울에는 이곳이 따뜻해서 몸을 녹이기 좋겠지만 더위에 지친 한여름에는 이 안이 건식 사우나 수준이다.
여러 유적들을 보면서 돌아다니다 보니 정말로 이 정원은 아무리 왕궁이라고 해도 너무 넓었다. 과거 카스티야 지역의 왕족들이 얼마나 많은 부를 축적하고 있었는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아마도 원래 큰 왕조였는데다가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에의 성공적인 투자로 축적한 엄청난 부가 더해졌을 것이다. 궁전이 소실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면 굉장했을 것 같다.
또 이 공원 안에는 아주 넓은 호수가 있는데 내 짐작으로는 인공호수로 보였다. 그런데 규모가 어마어마했고 호수 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트를 타고 있었다. 오후 들어 체력도 어느 정도 소진된 데다 뜨거운 태양열에 지친 아들과 나는 보트를 탈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근처에 앉아서 1유로씩 하는 핫도그를 하나씩 사 먹었다. 앉아서 호수를 보면서 시간을 보내다 남쪽으로 들어왔던 레티로 공원의 북쪽 문으로 나오니 알칼라 문이 있었다. 이 알칼라 문이 있는 위치가 여행의 시발점이었던 중앙우체국이 있는 시벨레스 광장과 동일 선상이니 이 레티로 공원의 남북으로의 길이가 상당히 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리 왕궁의 정원이라 해도 너무 넓고 화려한 곳이었다.
카스티야 왕국의 엄청난 부와 신대륙 발견으로 더해진 막강한 부를 바탕으로 16세기 세계최강이었던 스페인도 물론 그후 몰락의 길을 걸었지만 지금도 이 막강했던 선조들이 남긴 유산으로 매년 전세계에서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인한 엄청남 관광수입을 올리고 있지만 현재는 막대한 재정적자로 전세계를 공포로 몰아가고 있는 금융위기의 진원지가 되어 버렸다. 많은 돈을 벌어서 유산으로 물려주어도 자손들이 능력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자식 농사가 가장 중요한 모양이다. 나 역시 여행 오기 전까지도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남유럽 국가들(스페인, 포루투갈, 그리스, 이탈리아등)의 상황을 체크하곤 했었다.
알칼라 문을 보고는 오늘의 여행을 여기까지 하기로 했다.
다시 솔 광장으로 오니 던킨 도넛이 보였다. 개인적으로 이곳 커피를 좋아하는 편이라 커피 한잔 하고 가자고 하니 웬일인지 아들이 반대하지 않는다. 아들은 이런 곳에서 커피 한잔 하는 돈을 상당히 아까워한다. 아마도 오늘 더위에 많이 걸어 다녔으니 상당히 지쳤으리라. 들어가서 아들은 아이스 카페라떼, 나는 카푸치노를 마셨다. 생각보다 내부가 시원하고 또 아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와이파이가 빵빵한 관계로 아들과 나는 스마트 폰으로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또 친구들과 카톡을 했고, 나는 그동안 이멜도 체크하고 국내 뉴스도 검색해 보았다.
결국 아이스크림까지 먹고서는 많은 시간을 보내고 나왔다.
솔 광장에서 그랑비아 전철역까지는 약간의 고갯길이 형성되어 있는데, 많은 인파로 붐비는 이곳에 첫날 발견한 뷔페식당이 있었다. 먹성 좋은 아들을 다시 먹이고 싶었는데 웬일인지 그냥 가자고 한다. 몸 컨디션이 안 좋은 건지 은근히 걱정이 되었는데 그랑비아 전철역에 와서 아침을 먹었던 Pan&Company 샌드위치 집이 보이자 다행히 여기서는 먹겠다고 한다. 정말 징그럽게도 빵을 잘 먹는 아들이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고…
오늘 여행은 시작과 끝이 모두 샌드위치 집이었고,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아들은 안달루시아 지방에 가서도 식사는 이 집에서 하면 되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런데 예상과 다르게 마드리드를 떠나자 이 집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서만 번성하는 프랜차이즈 식당인 것 같다.
정말 샌드위치를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아버지 주머니 사정을 봐주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맛있어하면서 잘 먹는 아들을 보는 것은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 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