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이 끝나고 7월 첫날인 2013년 7월 1일 (월)에 우리는 마드리드를 뒤로 하고 그라나다로 떠났다. 이미 더위가 시작되어서 마드리드에서 제법 고생한 우리는 본격적인 여름의 시작인 7월이 시작함과 동시에 더 더운 남쪽 안달루시아 지역으로 내려갔다. 이제부터는 더위와의 싸움도 시작되겠지.
한번 와본 경험이 있는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와 달리 이제부터 시작되는 안달루시아 지역은 나에게도 첫 경험이다. 스페인이 처음인 아들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새로 가는 지역에 대한 설렘보다는 더워서 어쩌지 하는 걱정이 더 앞섰다. 특히 알함브라 궁전은 하루 종일 관람하는 것으로 이미 입장 티켓까지 모두 예약했다고 하는데 정말 뜨거운 지역인 안달루시아에서 하루 종일 태양 아래서 버틸 일이 걱정이었다. 아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알함브라가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더위 앞에서 감동이 일어날 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더니… 물론 알람브라 궁전에서는 이 생각이 완전히 바뀌는 반전이 있었지만...
아침 일찍 일어나서 어젯밤 미리 싸 둔 짐들을 들고 집을 나섰다. 물론 5층에서 그 큰 가방을 들고 내려오느라 아침부터 땀을 흘리기 시작했고 그랑비아 역까지의 길도 가방을 굴리고 가기는 너무 힘들었다. 어제 밤 축구에서 브라질에게 대패한 스페인 인지라 조심하면서 가는데 아니나 다를까 밤새 술을 먹었는지 몇몇 취객들이 알 수 없는 스페인 말을 지껄이며 시비를 걸어왔다. 외국에서 이런 경우 상당히 당황스럽다. 혹시 시비라도 붙어서 같이 경찰서에 가면 말도 안 통할 테고 또 외국인인 나를 더 유리하게 취급해 줄 것 같지 않았다. 황급히 그 자리를 피하고 전철을 탔는데 월요일 아침 출근 시간과 겹쳐서 많은 인파 때문에 상당히 고생했다.
어제 톨레도 다녀왔던 아토차 역에 도착했다. 9시 5분 기차였으므로 시간 여유가 있어서 역에서 간단한 아침 식사를 했다.(물론 샌드위치) 항상 겪는 일이지만 까다로운 짐 검사를 마치고 기차에 탑승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통상적으로 스페인 포르투갈 라인을 구입하면 개별 기차 시간과 좌석을 예약해야 한다. 이 패스의 특성인지 아니면 워낙 이 구간들이 성수기에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곳이어서 인지는 몰라도 항상 시간과 좌석이 지정되어 있었다. 나중에 중부 유럽에서는 유레일 패스만 보여주면 아무 시간이나 타고 또 비어있는 아무 자리에나 앉으면 되었는데…
늘 그렇듯이 이어폰을 주고커피 한 잔을 주는 경우도 있고 아니면 식당칸의 메뉴를 주면서 주문하면 배달해 준다는 안내도 한다. 항상 하는 이야기지만 유럽의 기차 여행은 항상 쾌적했다. 특히 우리 좌석이 1등석이어서 더 그랬겠지만…
그라나다 도착 시간이 오후 1시 25분이라 하니 4시간 20분이 소요되는 제법 긴 거리의 기차 여행이다. 와이파이가 안 되니 아들과 나는 각자 스마트 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눈을 감고 밀린 잠을 청했다.
사실 5년 전에 아내와 스페인 여행할 때 당근 그라나다는 일정에 들어 있었다. 그런데 스페인 오기 전 파리를 여행하다가 우연히 만난 포르투갈 인이 리스본을 적극 추천해 주어서 내가 갑자기 일정을 변경해서 포르투갈을 가느라 알람브라 궁전을 가지 못했다.
우리한테 알람브라 궁전이 있는 곳으로 더 유명한 그라나다를 포함한 세비야, 코르도바, 말라가, 사라고사 등으로 대변되는 안달루시아 지역은 이슬람교도들이 이베리아 반도를 건너와서 침략하고 점령하고 있는 동안 가장 먼저 점령되고 가장 마지막에 해방이 된 지역일 것이다. 711년에 북아프리카를 점령한 이슬람 세력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서 이베리아 반도에 침입했고, 1492년에 마지막으로 그라나다에서 격퇴되어 돌아갔으니 자그마치 700여 년 세월을 이슬람 문화권에 있었던 셈이다.
711년 이베리아 반도에 들어와서 20여 년 기간 동안 전 이베리아 반도를 파죽의 기세로 점령하고 732년 피레네 산맥을 넘어 전 유럽을 차지하려던 이슬람 세력은 앞에서 말한 대로 프랑크 제국의 카를로스 대제에게 제동이 걸린다. 이 기간 동안 이슬람 세력인 코르도바 왕국의 지배를 받았는데, 후에 이 코르도바 왕국은 세비야, 말라가, 사라고사, 그라나다 왕국으로 분열되었고 분열된 이후에도 여전히 이슬람의 통치를 받았다.
이때 에스파냐에 살던 기독교 귀족들이 중심이 되어서 빼앗긴 국토를 되찾자는 운동이 일어나는데 이것을 레콘키스타라고 부른다.
이 레콘키스타는 로마 교황의 후원과 마침 코르도바에서 분열된 이슬람 세력의 약화로 인해서 진도가 나가는 듯했으나 그 속도가 너무 더디었고, 심지어 십자군 원정이 거세게 진행되어 1099년 예루살렘이 기독교 군대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정복되었을 때에도 에스파냐의 약 절반 정도만 이슬람 세력에서 벗어나 있었다.
13세기 말이 되자 에스파냐의 거의 전 지역이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영토를 되찾았지만 오직 그라나다 만 이슬람 세력권 하에 있었고 1492년에 물러날 때까지 거의 200년을 더 버텼던 것이다.
이렇게 오랜 기간 버틴 이유에 대해서 유럽보다 몇 단계 수준이 높은 과학과 문명 덕분이라고도 하고, 또 오히려 이런 높은 문명을 받아들이는 창구로 사용하기 위해서 일부러 존속시켰다는 설도 있다. 그 당시 그라나다 왕국은 카스티야 왕국에 조공을 바칠 정도로 약해져 있었다는 사실이 이 주장을 뒷받침 해 주기도 한다.
로마 멸망 이후 유럽은 혼란기와 교권이 지배하는 중세 암흑기를 맞는 동안 이슬람 세력은 많은 정복을 통해서 고대 로마와 그리스의 전통을 흡수하고 인도의 문화를 받아들여서 아라비아의 선진 수학과 기하학, 그리고 천문학을 완성하면서 높은 수준의 문화와 과학을 가지게 된다.
이 당시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세력은 많은 왕국들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서 3개의 강력한 왕국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중앙에 카스티야 왕국이 있었고, 동쪽(카탈루냐 지역)은 아라곤 왕국, 그리고 서쪽은 포르투갈 왕국이 지배했었다. 레콘키스타를 외치면서도 이 3 왕국의 갈등과 각축전으로 서로 힘을 모으지 못한 상태에서 그라나다 왕국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는데 이때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바로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라 공주와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 왕자의 결혼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서로의 주권을 부분적으로 인정하면서 통일 카스티야 왕국으로 거듭 난 두 왕국(아마 이때부터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하는 카스티야와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하는 카탈루냐의 갈등이 시작되었을 것이다)은 막강한 군사력을 동원하여 1492년 1월 2일 이베리아 반도의 마지막 이슬람 세력권이었던 그라나다를 함락시키고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게 된다.
사실은 전쟁도 없이 무혈입성하였다고 하는데 그라나다 왕국이 이슬람교도의 종교와 재산권, 그리고 상권을 유지해 준다는 조건을 제안했고 이사벨과 페르난도 2세가 이를 수락되자 저항을 포기하고 순순히 그라나다를 내주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갔다고 한다.(부의 역사, 권홍우 저 참조 및 인용)
이렇게 전쟁 없이 영토를 되찾았기에 그 유명한 알람브라 궁전이 현재까지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또 적의 궁전이지만 파괴하지 않고 그대로 존속시킨 당시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과 페르난드 2세 공동 국왕의 큰 문화적 안목이 나를 위시한 세계의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이렇게 보존한 이 궁전이 매년 스페인에 얼마나 많은 관광수입을 올려주는지는 다들 잘 아실 것이다. 지도자 한 명의 현명하고 대승적인 판단이 후세에 이렇게 큰 혜택을 준다.
신년 새해 벽두에 이 소식이 전해지자 유럽 전역이 감격에 젖어 열광했고, 에스파냐는 일약 유럽의 강대국으로 떠오르게 된다. 아마 이때 포르투갈 왕국까지 힘을 합쳤다면 현재 포르투갈이라는 나라는 없고 스페인으로 통합되었을 지도 모른다. 다만 지금의 카탈루냐 같이 카스티야 에 대한 지역감정이 대단하겠지만…
또 반대로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의 결합이 없었다면 현재의 스페인은 카스티야와 카탈루냐의 2개국으로 나뉘어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현재의 지역감정도 존재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15세기에 통합된 두 지역이 6세기가 지난 21세기에는 다시 분리 독립하려고 하니 이래 저래 역사는 참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