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톨레도에 가기로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전철을 타고 아토차역으로 갔다.
항상 행군에 익숙했던 아들과의 여행에서 거의 최초로 전철을 이용하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바르셀로나에서는 전철을 전혀 이용하지 않았고 마드리드에서도 마지막 날 처음이자 마지막 전철 이용이다.
마드리드의 전철이 처음인데도 아들은 무인 티켓 발매기에 가서 먼저 화면을 영어로 바꾸더니 순식간에 표 2장을 구입한다. 내가 옆에서 아무리 봐도 미처 영어를 다 읽기도 전에 바로바로 화면을 터치하면서 화면 변경을 하고는 신용카드를 집어넣고 표가 나오는 시간이 아마도 내가 했을 때 보다 2배는 빠른 것 같았다.
아들의 순발력과 똘똘함은 익히 알고 있지만 다시 한번 감탄하면서 동시에 나도 늙었음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도 저런 기계를 사용할 때 빠르게 처리해서 주위 사람들의 감탄을 듣곤 했었는데 어느덧 아들과는 상대가 안 되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이번 여행에서 뼈저리게 느낀 것이 아직도 배낭여행을 다닐 수 있는 체력은 되는데 눈이 쫓아오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평생 안경 한번 안 써보고 항상 그리고 지금도 시력은 1.0 이상을 유지하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찾아오는 노안은 피할 수 없었다. 이럴 때마다 돋보기를 꺼내어 써야 가능한데 안경 쓰는데 익숙하지 않은 나로서는 너무도 힘들고 불편한 일이었다. 그래도 체력이 아직 허락함을 감사히 생각해야겠다고 나 자신을 위로했다.
기차는 스페인 포르투갈 패 스로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들이 이번 여행에서 스페인 포르투갈 패스를 4일만 끊어 왔다고 한다. 이미 바르셀로나에서 마드리드에 올 때 한번 사용하였고, 내일 여기서 그라나다 갈 때 그리고 그라나다에서 세비야 갈 때 마지막으로 세비야에서 야간 버스 타고 포르투갈 리스본에 갈 때 사용할 계획이라 한다. 그래서 이번 톨레도 가는 기차표는 별도로 구입하기로 했다.
급행열차 표를 구입했는데 20유로씩 해서 총 40유로를 지불했다. 급행인 관계로 시간은 30분 정도면 도착한다고 한다. 표를 구입하고는 시간 여유가 있어서 브런치를 먹으려고 하는데 여기도 Pan&Company가 있어서 매일 먹는 셋 메뉴(둘이 합쳐서 9.9유로)를 먹었다. 식사 후 기차를 타는 수속을 밟았는데 여기서도 짐 검사는 철저했다.
10시 20분에 출발했는데 10시 53분에 정확히 톨레도에 도착했다.
톨레도 역에 도착하자 바로 수많은 호객꾼 들이 달려들었다. 주로 당일 가이드 투어 호객행위였는데 우리는 애초에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는 같은 열차를 타고 내린 사람들이 일렬로 줄을 서더니 4명씩 인원을 맞추어 택시를 타고 바로바로 떠나갔다. 아마도 기차 도착 시간에 맞추어서 택시들이 줄 서서 기다리다가 4명씩 태우고는 톨레도 시내로 가는 것 같았다. 요금은 4.5유로씩이라고 한다.
상황 파악이 완전히 되지는 않았지만 나이 먹은 사람의 감으로 봤을 때는 무조건 택시를 타야 했다. 그런데 아들은 전혀 생각이 달랐다. 전철도 특별한 경우 아니면 이용하지 않는 본인 배낭여행의 특성상 택시라는 것은 전혀 고려 대상도 아닌 듯했다. 이때만큼은 나도 여행 후 처음으로 강력하게 택시 탈것을 요청했으나 아들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순식간에 그 많던 사람들이 택시 타고 다 사라지고 우리 말고 가족인 듯 보이는 다른 4명만 남았다. 줄 서서 기다리다 손님을 못 태운 택시 기사가 마지막으로 와서 우리를 설득하는데 여기서도 아들은 고집을 부린다. 이제 마지막 택시도 가버리고 거의 동시에 어떤 차가 오더니 우리 말고 택시를 안 탔던 가족들을 태우고 간다. 아마 톨레도에 연고가 있어서 역에 마중 나온 것 같았다.
기차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내렸는데 어느새 역에는 나와 아들만 남기고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미 여름에 들어선 톨레도의 뜨거운 태양만이 우리와 함께 하는 듯했다.
길을 나서서 쭉 뻗어 있는 아스팔트를 걸어가는데 위에는 뜨거운 태양이 밑에서는 달구어진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복사열이 우리를 사정없이 공격하였다. 아스팔트는 언제쯤 끝나서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는 톨레도에 올라갈 수 있을지 암담하기만 했다.
이쯤에서 나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아까 택시를 탔어야 했는데 왜 그렇게 말을 듣지 않고 고집을 부리는지, 그리고 오늘 당일 여행이라 이미 저녁에 마드리드로 돌아가는 기차는 저녁 6시 25분인데 이렇게 길에서 시간과 에너지를 다 써 버릴 것 같았다. 아마 이때도 또 한 번의 고비였는데 다시 한번 잘 참았고, 이런 색다른(?) 경험을 준 아들에게 감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마음먹으니 서서히 분노가 사그라진다. 좋은 그리고 귀중한 경험이야 하면서 계속 나를 세뇌시키고 있었다.
한참 걸어서 아스팔트가 끝나자 드디어 따호강이 나타나고 이 아름다운 강에 둘러싸인 언덕 위의 톨레도시가 모습을 나타낸다.
유럽의 도시들을 보면 대부분 작은 규모의 도시 국가로 출발했고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하여 언덕 위에 건설되었다. 거기에 더 첨가되는 안전장치로 언덕 주변에 깊은 수로를 만들어서 평소에는 다리로 건너게 하고 유사시에는 다리를 들어 올려서 적이 접근을 차단하였다. 그런데 이 톨레도는 언덕도 상당히 가팔랐고 거기에 주변을 상당히 큰 강인 따호강이 자연적으로 둘러싸고 있어서 상당히 견고해 보였다. 지금은 역에서 가면서 따호강을 건너려면 알깐따라 다리(Puentede Alcantara)를 지나게 되는데 상당히 아름다운 다리였다. 알깐따라 라는 말이 아라비아 말로 다리라고 하며 13세기 알폰소 10세의 명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이 다리 위에서 보는 톨레도 풍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이런 견고한 도시도 711년 북아프리카에서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 반도에 침입한 이슬람교도들에게 정복되어서 약 400년간 지배를 받게 되니 참 그 당시의 이슬람 세력은 대단했던 것 같다. 로마 멸망 후 유럽은 사분오열되었지만 사막에서 발흥한 이슬람의 위세는 하늘을 찔러서 순식간에 이베리아 반도는 이슬람 세력에 정복당하고 만다. 이렇게 들불처럼 크게 번지며 금방 유럽 전역을 삼킬 것 같았던 기세의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서구 문명을 지켜낸 이는 다름 아닌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이다. 피레네 산맥(지금의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에 있는 산)을 넘으려는 이슬람 군대를 극적으로 격퇴시켰는데 아마도 이때 막지 못했으면 유럽 전역은 이슬람 세력에 복속되어서 아마도 우리가 지금 보는 기독교국가인 유럽의 모습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서양에는 언어에 따라 철자와 발음이 조금씩 다르지만 비슷한 이름들이 많다. 기독교 문화의 영향으로 신약에 나오는 세례 요한(Johannes)에서 유래된 이름들이 대표적이다. 영어권에서는 존(John)이라는 이름으로, 프랑스에서는 장(Jean), 독일에서는 요하네스(Johannes), 이탈리아에서는 조반니(Giovanni), 스페인에서는 후안(Juan), 이웃나라인 포루투칼에서는 주앙(Joao),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는 얀(Jan), 그리고 러시아에서는 이반(Ivan)으로 불리어진다. (부의 역사, 권홍 후 저에서 인용)
그런데 성경에 나오지 않는 인물로는 이 카롤루스(Carolus) 대제의 이름에서 유래된 성이 대표적이다. 샤를(Charles), 찰스(Charles), 칼 (Carl), 카를(Karl), 카를로스(Carlos)등으로 불리어지는데 이는 모두 유럽을 이슬람에서 구해낸 영웅을 닮고 싶어서이다.
이 당시에는 유럽인들은 피레네 산맥 북쪽만 유럽이고 남쪽인 이베리아 반도는 아프리카라고 했다고 한다. 당시 이슬람 세력에 의해 북 아프리카가 이미 정복되었기 때문에 이베리아 지역 역시 유럽이 아닌 북 아프리카 지역이라 한 것이다. 거의 700년에 걸쳐 이슬람 세력권 안에 있었으니(톨레도는 약 400년) 일제 치하의 36년을 길게 느끼는 우리와는 또 다른 상황일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스페인 도시들을 다니면서 전형적인 스페인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기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아마도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많은 피가 섞여서 이지 않을까 혼자 생각해 보았다.
이런 역사를 가지고 있는 톨레도는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고색창연한 모습과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문화가 공존하기 때문에 상당히 인상적인 도시이다. 특이하게도 이슬람 세력은 경제적인 능력이 있는 유대인들을 전혀 박해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대교 문화도 당당히 자리를 잡고 있다. 5년 전 이곳을 처음 방문했을 때 나는 거의 이 도시의 모습이 충격적이었다. 도시 전체가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잘 보존되어 있었고 내가 관심이 많은 칼을 위시한 각종 중세 무기들과 화려한 장신구들을 현재도 많은 가게에서 그대로 판매하고 있다. 특히 좁은 골목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서 신경 쓰지 않으면 길을 잃어버리기 쉽다.
이런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아름다운 도시를 5년 전에는 버스를 타고 와서 도시 자체만 볼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기차를 타고 오는 바람에 또 아들이 택시를 안 타고 고집부리는 바람에 이슬람 군대가 쳐들어간 경로대로 강 건너의 지역부터 걸어가면서 그 당시를 느낄 수 있었으니 오히려 아들에게 감사해야 할 것 같다.
본인 고집 때문에 이런 더위에 걸어가면서 짜증도 나고 또 아빠한테 미안하기 도 한 감정들이 섞여서 저만큼 앞장서서 혼자 걸어가고 있는 아들을 불러서 이런 역사적인 배경들을 이야기해 주면서 네 덕분에 좋은 경험을 한다고 이야기해 주었더니 멋쩍어하면서도 기분은 많이 풀리는 것 같았다.
다리를 건너서 이제 가파른 경사를 오르게 되었는데 길도 있고 군데군데는 층계도 조성되어 있는데도 너무 힘이 들었다. 시간은 약 30분 정도 걸렸던 것 같은데 숨이 턱에 차서 도중에 2번 정도 쉬어갈 정도의 급경사의 오르막 길이었다. 건장한 아들과 왔으니 망정이지 5년 전 아내와 이 길로 왔다면 큰일 났을 듯하다.
옛날 이슬람 군대가 침입했을 때는 이런 길도 없었을 테니 모르긴 몰라도 정복에 성공한 이슬람 군대도 타격이 상당했을 것 같다. 우리가 역사에서 단 1줄로 묘사되는 전쟁들도 그 당시 이 전쟁에 참여했던 군인들 개인적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희생이 있었음을 느껴야 하겠다. 군대에서 각개전투 훈련을 해본 나였기에 여기를 정복하기 위한 그들의 고통이 어땠을까 짐작이 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들과 서로 파이팅을 외치며 힘겹게 올라가서 드디어 톨레도의 중심지인 소코도베르(Zocodover) 광장에 도착했다.
광장에 도착하니 너무나 낯이 익었다. 5년 전에 광장에 있던 맥도널드까지 그대로 그 위치에 있었다. 하긴 중세 모습을 지켜온 도시인데 5년쯤이야…
오랜 행군(?)에 지친 아들과 나는 일단 자리를 잡고 앉아서 가뿐 숨을 몰아쉬며 휴식을 했다. 광장 바로 옆에 있는 것이 산타 크루즈 미술관인데 예상했던 대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휴식을 마치고 톨레도 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알까사르 요새를 방문했다. 역시 광장에서는 도보로 약 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상당한 오르막 경사의 골목길을 가야만 했다. 가장 높은 곳에 있다 보니 어디서나 보여서 앞의 다리에서 올려다본 톨레도 시의 사진에서 보이는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성곽이 알까사르이다.
이곳도 스페인의 역사 속에서 험난한 세월을 보낸 곳인데 로마시대에는 집정관이 주둔하였던 곳이고, 이후 서고트 족이 이를 파괴하고 요새를 지었으며, 그 뒤에 이곳을 점령한 이슬람교도들이 개축하면서 고딕 양식이 혼합되었다고 한다. 이후에도 개축을 반복하다가 카를로스 5세 때는 궁전이 되기도 한다. 스페인 내전 때는 프랑코 군이 이곳에서 약 70일간 전투를 벌였다고 하니 정말 스페인의 모든 역사가 깃들어 있는 곳이다.
현재는 군사 박물관이 들어서있는데 역사적인 무기들에 관심 많은 나에게는 볼 만한 장소였다. 운 좋게도 이날이 일요일이라 입장료는 없다고 한다.
이제 나한테는 인상적이었던 이곳의 대성당 즉 카테드랄을 방문하였다. 1227년에 페르난도 3세의 명으로 지어진 성당인데 완성까지 266년이 걸렸다고 한다. 거의 10세대에 걸쳐 그 당시 사람들은 공사 중인 현장만 보았을 거다. 스페인 가톨릭의 총 본산이고 웅장한 고딕 양식이다
일요일이라 이곳에서 미사를 보고 있어서 오후 2시 이후에 내부를 관람할 수 있다고 한다.
점심때라 배도 출출해서 샌드위치와 콜라를 사서 벤치에 앉아서 먹었다. 오후 2시 지나서 입장이 허용되었는데 입장료는 8유로씩이었다. 둘이 16유로가 들었는데 특이하게 카드는 안 되고 오직 현금만 가능하단다. 내 실수로 현금을 너무 적게 가져간 탓에 이때부터 카드 안 되는 곳에 가면 슬슬 스트레스 받기 시작했다.
내부에 들어서니 5년 전에 느꼈던 감동이 다시 전해졌다. 성당 관람에 크게 흥미가 없는 아들도 상당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특히 섬세한 조각들은 절로 탄성을 자아내고, 엘 그레코, 고야, 티치아노 등의 유명 화가들이 직접 그린 프레스코화 등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중에서도 나 개인적으로 가장 압권이라고 느끼는 곳은 보물실이다. 이곳의 무게 200Kg에 육박하는 성체 현시대가 유리관 안에 전시되어 있는데 정말 눈이 부시다.
이곳에서 많은 사진을 찍어서 저녁에 숙소에서 우리 가족 카톡방에 올렸더니 아내한테 바로 답신이 왔다. 5년 전의 기억이 난다면서… 아마 나뿐만 아니라 아내한테도 이곳은 잊지 못할 인상적인 곳이었던 모양이다. 이제는 아들에게도 기억에 생생한 장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개인적으로도 스페인의 카테드랄 중에서 이곳 톨레도의 카테드랄이 최고인 것 같다.
성스러운 분위기에 압도되어 자리를 잡고 앉아서 하나님께 기도한 후 옆을 봤더니 오늘의 고된 일정에 지친 아들이 떡실신이 되어서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얼른 사진을 찍었고 나중에 가족 카톡방에 올렸다.
성당을 나와서 다시 광장으로 오니 톨레도를 일주하는 기차 모양을 한 차량이 있길래 물어보았더니 요금은 1인당 5.1유로이고 시간은 약 45분 정도가 소요된다고 한다.
이 차를 타고 돌면서 오늘 다녔던 곳을 마지막으로 한번 둘러보고 또 휴식을 취하는 시간도 가졌다. 군데군데 정차를 하면 주변을 구경하고 사진도 찍고 하면서.
다시 광장으로 와서 5년 전에도 아내와 마드리드 가기 전에 간단한 요기를 했던 맥도널드에서 햄버거와 음료수를 먹었다. 다시 역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아들과 나는 오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다시 걸어가자고 의기투합했다. 내려가는 길이니 덜 힘들지 않겠나 하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힘들고 또 먼길이었다. 어떻게 이 길을 올라왔었나 싶다. 올라갈 때와 마찬가지로 내려갈 때도 엄청 고생했는데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는 말이 정말로 실감 났다.
역에 도착해서 6시 25분에 기차를 탔고 6시 58분에 마드리드의 아토차 역에 정확히 도착했다. 다시 전철을 타고 솔 역으로 와서 그랑비아 역으로 걸어가는 도중에 지난번 들렀던 던킨 도넛 매장에 다시 가서 아이스크림도 먹고 시원하고 와이파이도 잘 터지는 그곳에서 스마트 폰도 하면서 하루의 피로를 풀었다. 이미 이 매장의 창구에 있는 사람(아들과 비슷한 연배의 알바생으로 보였음)과 아들은 안면이 있어서인지 친해져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곤 했다.
마드리드의 모든 곳과 함께 이곳도 이제는 마지막이다
숙소에 도착해서 샤워하고 나니 집주인이 친구 집에 다녀오겠다고 나갔다. 나중에 다시 전화 와서 오늘 친구 집에서 자고 간다고 하면서 내일 아침 열쇠는 식탁 위에 놓고 가면 된다고 이야기했다. 잘 가시고 또 좋은 여행되기를 바란다는 덕담과 함께. 아들이 오늘 저녁 브라질과 스페인의 축구 결승전을 봐도 되는지 허락도 득하고 마드리드에서의 마지막 밤을 우리만 맘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오늘 하루를 돌아보면서 정말 힘든 하루였지만 그래도 고비를 잘 넘기고 아들과 아무 문제없이 무사히 여행을 마친 것이 너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순간 화를 못 참고 말을 쏟아부었다면… 생각하기도 싫었다.
오늘 일을 계기로 앞으로도 아들도 잘 지낼 자신감이 처음 들었다.
아들을 노엽게 하지 말자. 그러려면 아들을 섬기자. 어떻게? 갑자기 생각난 것이 내가 을이고 아들이 갑이라고 생각하고 섬기자.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에 확 와 닿았다. 평생을 직업상 갑보다는 을의 입장에서 살아온 나는 이 비유가 너무 잘 이해가 되었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많은 아버지들은 말할 것이다. 그렇게 아들을 버릇없이 키워서 어떻게 하냐고? 또 아들한테 까지 그렇게 비굴하게 굴면서 살아서 무엇하냐고?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내가 아들을 갑으로 모셨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를 슈퍼 갑으로 모시는 아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들한테 대접을 받고 싶으면 먼저 아들에게 대접을 해 주면 된다. 우리의 아들들은 아버지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생각이 없지 않다. 오히려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생각이 깊다. 이번 여행은 아들보다는 내가 더 성숙해지는 느낌이다.
오늘 고생했지만 하체 운동은 정말 잘 했다고 생각했는데 잘 한 것이 아니고 너무 심하게 했던 모양이다. 잠을 자다가 새벽에 다리에 쥐가 나서 고생했다. 젊을 때 군대에서 유격훈련을 하고 밤에 다리에 쥐가 나서 깬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