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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on May 10. 2016

41. 부다페스트 도착 및 여행

부다페스트 도착 및 여행


오늘은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가는 날이다.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체크 아웃하고 빈 서역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11시 48분 기차를 타고 부다페스트로 향했는데 14시 50분에 부다페스트 역에 도착하였다.  약 3시간 정도가 소요되는 기차 여행이었다.  나와 아들만이 아닌 아내 역시 유럽의 기차여행을 상당히 즐겼다.

  

부다페스트에서도 마땅한 B&B를 구하지 못한 아들은 호텔을 예약했다.  체크인을 하는데 카운터에 앉아있는 남자 직원은 유창한 영어와 유머를 겸비한 친절한 사람이었다.  이곳에서는 도시세 2유로씩(1인당)을 내야 하는데 이 남자 직원은 부다페스트 시민이 외국인을 집으로 초대한 경우도 1박에 똑같이 2유로씩 납부해야 한다며, ‘stupid regulation’이라고 어깨를 으쓱한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다시 만난 대륙성 기후는 견디기 힘든 여름 더위를 우리에게 선물했는데 이곳 부다페스트도 같은 기후대이며 너무 더워서 힘들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주어서 우리를 심란하게 했고 이어서 좋은 소식이라 하며 방에 에어컨이 있다고 이야기해주었다.  호텔방에 당연히 에어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우리와 달리 이곳에서는 그것도 자랑인 것 같았다.  덧붙여서 체크 아웃할 때 반드시 에어컨 리모컨을 반납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만일 이 리모컨을 분실하면 아마도 사장이 자기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농담반 진담반의 말도 같이 했다.


근처에 헝가리 전통음식을 맛볼 수 있는 식당을 소개해 달라고 하자 주저 없이 호텔 근처의 레스토랑을 강력 추천하였다.  자기도 요리 만드는 것이 취미라면서 정말 이 레스토랑의 세프는 실력이 있다고 이야기하였다.

방으로 올라가 보니 침대가 3개 있는 깨끗하고 좋은 방이었다.  계속 느끼는 것이지만 엄마가 온 후 숙소의 수준이 나랑 둘이서 다닐 때와는 너무 차이가 났다.


먼저 식사를 하기로 했다.  추천한 레스토랑을 찾아가 보니 ‘Babar’라는 조그만 동네 식당이었다. 정말 이 집이 그렇게 맛이 있을지 의심이 갔지만 아내는 헝가리 전통음식인 굴라쉬 그리고 아들과 나는 돼지고기와 오리고기로 조리한 음식을 시켰는데 너무 맛이 훌륭했다. 무엇보다도 유럽 와서 계속 느끼는 짠 음식이 아니었다.  이곳에서는 유로화를 쓰지 않고 자국 화폐인 포린트(HUF)를 쓰는데 음식값이 7,854 HUF(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약 39,000원 정도)가 나왔다.

 

 만족한 식사 후 전철을 타기 위하여 지하철 역으로 이동했다.  걸어가면서 처음 접하는 부다페스트의 모습은 정말 이국적이었다.  우리의 숙소인 Elit 호텔의 건물도 상당히 고풍스럽다.

전철역에 가서 일인당 300 포린트인 티켓을 사서 전철을 탔다.  이곳 역시 모스크바와 같이 유사시에 방공호로 쓰렸는지 몰라도 얼마나 깊게 파 놓았는지 정말 한참 내려가야 전철을 탈 수 있다.

전철을 타고 데아크 페렌츠(Deak Perenc) 광장으로 갔다. 이곳에서 부다페스트 최대의 번화가로 우리의 명동에 해당하는 바찌(vaci) 거리를 구경했다.  수많은 상점이 밀집해있는 이 거리는 사람들이 밀집해 있어서 여행의 또 다른 볼거리인 사람 구경 하기에 충분했다.

이 거리의 또 다른 특징은 보행자를 위한 거리라 자동차가 진입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곳에 뮌헨에서 보았던 ‘New Yorker’라는 중저가 브랜드 의류상점이 있어서 반바지를 하나 구입했다.  ‘Zara’와‘H&M’이 주축이 되는 유럽의 중저가 의류시장에 이 ‘New Yorker’라는 브랜드는 내 취향에 맞는 디자인의 옷들이 많아서 뮌헨에서부터 애용하던 곳이다.  가격은 정말 저렴해서 이날 구입한 반바지가 그나마 가장 비싼 옷이었는데 가격은 우리나라 돈으로 35,000원 정도였다.

중부 유럽 도시에서만 발견할 수 있으며 이곳을 벗어나면 유일하게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이 상점을 발견하였다.  단 이름과는 다르게 미국 뉴욕에 가면 이 의류 브랜드는 발견할 수가 없다.


 이제 이곳에서 북쪽으로 조금 걸어 올라가면 세체니 다리를 만난다.  이 다리는 세체니 백작이 만든 것으로 19세기에 만들어진 이 다리로 인해 14세기경 수도였던 정치 중심지인 부다와 상업지구인 페스트가 하나로 이어지게 되었으며 이름도 부다페스트가 된 것이다.

부다페스트는 도시 한 가운데를 그 유명한 도나우강이 가로질러 흐르고 있다.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이 강을 사이로 서쪽이 부다이고 동쪽이 페스트이다. 

도나우 강은 독일에서 시작되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다가 체코에서 갑자기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서 흐르는 강이라 한다.  이렇게 강의 방향이 갑자기 바뀌는 곳이 자연적인 풍광이 상당히 좋다고 하는데 이 도나우 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부다페스트는 이런 이유로 ‘도나우의 진주’로 불리어진다.


이 세체니 다리를 건너면 페스트에서 부다 지역으로 가게 되며 건너자마자 바로 만나는 곳이 왕궁의 언덕이다.  이 언덕은 해발 167미터라 하는데 실제로 가서 보면 상당히 높아 보인다.  또 언덕이 도나우강을 따라 남북으로 넓게 펼쳐져 있다.  

페스트 지역에서 세체니 다리를 건너면서 보면 왕궁을 중심으로 우측으로는 마차시 교회와 어부의 요새 등의 명소가 있고 왼쪽으로는 전망을 볼 수 있는 장소로 유명한 겔레르트 언덕이 있다.

사실 이 전경이 부다페스트를 대표하는 사진으로 많이 소개되고 있고 반대편인 페스트 지역에는 또 하나의 부다페스트를 상징하는 국회의사당 건물이 있다.  이런 이유로 세체니 다리를 건너다 양 지역을 번갈아 보면 마치 하나의 그림엽서를 보듯이 말도 안 되는 멋진 모습이 보인다.


다리를 건너면 좌측에 왕궁의 언덕을 오르는 경사진 트램이 있다.  일단 우리는 늦게까지 야경을 다 볼 계획이었으므로 왕복이 아닌 편도표를 구입해서 올라갔다.  요금은 편도는 840, 그리고 왕복은 1450 포린트이다.

 

먼저 왕궁은 이 헝가리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반영하듯 13세기 몽고의 침입으로 국토가 유린되고 많은 국민들이 목숨을 잃는 끔찍한 사건 이후 이 언덕에 요새를 건설하였다.  15세기 중세 헝가리의 황금시대를 이룩한 마차시 1세 때는 이 성이 화려한 르네상스 양식으로 다시 지어졌지만 16세기 투르크 군에 의해 파괴된다.  17세기부터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았는데 이때 다시 재건되었다가 2번에 걸친 세계대전 때 다시 파괴되는 참화에 시달렸고 현재의 신고전주의 건축양식의 모습은 20세기 중반에 이루어진 것이다

왕궁과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는 그곳에 있는 카페에서 차를 마셨고 저녁식사로 피자도 시켜 먹었다.  그러면서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는데 그 이유는 아시다시피 부다페스트의 야경이 워낙 유명하기 때문이다.


서서히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자 더위도 가시면서 멋진 야경을 보여줄 조명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역시 멋진 야경은 얼마나 좋은 조명을 비추어 주느냐가 관건인 것 같다. 

 

 먼저 왕궁의 모습은 조금 전 밝을 때 보았던 왕궁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니 우리가 건너왔던 세체니 다리도 환하게 조명이 들어왔다.

이제 이곳을 충분히 즐기고는 낮에도 가지 않았던 마차시 교회 쪽으로 걸어갔다.  

야경으로 보는 마치 시 교회는 너무 아름다웠고 고딕 양식의 외부 모습은 지금까지 보아 온 교회와는 또 다른 느낌을 주었다.  14세기에 건립되었는데 16세기에 투르크 군의 침략으로 약 1세기 반 동안은 이슬람 사원으로 쓰이기도 했다고 한다.  18세기에 그리스도 교회로 회복된 후 1867년 헝가리 왕으로 즉위한 합스부르크가 의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엘리자베스 황후의 대관식이 이곳에서 거행되었다고 하는 유서 깊은 곳이다.

이 교회를 충분히 본 후 계속 북쪽으로 걸어가면 어부의 요새가 나온다.


이 어부의 요새는 도나우 강변에 지어진 백색 요새 건물이다.  1896년 건국 1000년을 기념하는 건조물로 기획되어졌고, 1902년 완공되었다고 한다.  

학창 시절에 세계사를 배울 때 특이하게도 헝가리는 유럽의 다른 나라의 인류와는 다른 마자르 인에 의해서 세워졌다고 배운 것이 기억났다.

  

13세기에는 몽고의 침입으로 전 국토가 유린되었고 인구수가 현저히 줄어들 정도의 죽음을 당하였고 16세기에는 앞서 말한 대로 투르크 족의 침입을 받아 그들의 지배를 받았고 그 후 합스부르크가 에 의해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 세워지는데 이때 마자르 인이 대거 유입되었고 이 마자르 인을 현재 헝가리인이라 부른다.  현재 헝가리 인구의 96% 정도가 이 마자르인이 차지하고 있고 인근 루마니아에도 살고 있다고 한다.  이들의 언어인 마자르어도 그래서 유럽의 다른 나라의 언어와는 다른 구조라고 하는데 헝가리에 있는 동안 이들의 언어를 유심히 들을 기회는 없었다.  아니 없었다기보다는 이들의 언어를 구별해 낼 능력이 내게 없었던 것이겠지만…


여담으로 19세기 마자르 인들이 헝가리에 들어올 때 유대인도 같이 들어왔다고 한다.  그 당시 전체 인구에서 유태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약 26% 정도였다고 하니 무시 못할 수준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미국의 조지 소로스도 이 헝가리 유태인이다.  금융천재라는 칭찬과 악랄한 환 투기 전문가라는 비난을 함께 받고 있는 이 소로스는 헝가리에 대한 애국심이 대단하여 많은 대학과 장학재단을 헝가리에 운영하고 있어서 수많은 인재들을 길러내는 일을 했다.

우리나라가 1998년 IMF 위기를 맞이했을 때도 이 소로스가 주범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각국마다 다니면서 안 좋은 금융기법으로 돈을 쓸어 담던 이 천재도 한국에서는 많은 손해를 보고 갔으니 어느 정도는 복수를 해 준 셈이라 해야 하나?


 이야기가 옆으로 샜는데 이런 마자르족의 특색을 반영하듯 헝가리풍의 뾰족한 지붕이 있는 7개의 탑이 눈길을 끈다.  얼핏 보면 스페인의 알람브라 궁전에서 보았던 양식과 비슷하기도 한데 나한테는 왠지 동양적인 냄새가 짙게 나는 건축 양식으로 느껴졌다.

특히 이곳에서 바라보는 도나우 강과 건너편 페스트 지역의 모습은 너무 아름다워서 유명한 곳이다.  이곳이 마냥 좋았던 우리는 떠날 생각 없이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제 이곳에서부터는 경사를 따라서 언덕에서 내려오게 되는데 조금 내려오자 단체 관광객인 듯 큰 버스가 정차하여있고 모든 사람들이 나와서 야경을 감상하고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리도 내려온 길을 돌아서서 올려다보니 지금까지 보아온 곳이 한눈에 들어와서 아름다웠다.

이제 이곳에서 또 놓칠 수 없는 야경이 강 맞은편 페스트 지역에 있는 유명한 국회의사당 건물 야경이다.  아마 이 사진이 부다페스트를 대표하는 사진으로 가장 많이 쓰일 것이다.  눈으로 볼 때는 황홀함 그 자체였는데 막상 사진으로 찍으니 그 느낌이 상당히 반감되는 것 같다.

여기서 오늘의 야경을 마무리했는데 그 여운은 너무 짙게 남아서 마음속에 오래오래 남았다.  정말 부다페스트의 야경은 꼭 보시라고 강추하고 싶다.


이제 호텔로 돌아가야 하는데 너무 늦은 시간이라 서둘러서 언덕을 내려가서 큰길로 가려하는데 좀처럼 큰길을 만나질 못했다.  계속 주택가로 보이는 인적 없는 골목길을 내려가는데 부다페스트 치안이 안 좋다는 소리를 한국에서 들은 지라 많이 걱정이 되었다.  위의 왕궁에 있던 그 많은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없는 골목길은 계속 이어지고 이 길이 맞는 길인지도 모르면서 단지 내려가는 길이라는 사실 한 가지만 믿고 갔는데 한참 지나서 큰길을 만났고 마침 택시가 있어서 타고 호텔로 갔다.


부다페스트는 낮과 밤이 전혀 다른 도시이다.  그리고 유럽에서도 상당히 이국적인 도시이다.


어릴 때 피아노를 배운 사람이면 누구나 연주해 보았을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 왈츠’가 뜬금없이 떠오른다. 나 역시 초등학교 때까지 피아노를 쳤었고 이 곡도 힘들게 배웠지만 그 당시 내가 이 도나우강에 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 같다.  도나우강이 어느 나라에 있는지도 모르고 사진으로도 못 본 어린아이가 피아노로 감정을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 같다.  지금은 직접 본 도나우  강과 주변 야경에 감정은 풍부해졌는데 이제는 피아노가 불가능하다.  이래서 인생은 참 오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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