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부다페스트 마지막 날이다.
오늘 밤에는 야간기차를 타고 체코 프라하로 넘어간다. 야간기차라는 것이 첫 경험이라 궁금하기도 했지만 안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크게 기대 안 하기로 했다.
어젯밤에 늦게까지 야경을 봐서 피곤한지 다들 아침에 조금 늦게 일어났다. 처음 일정을 보았을 때 잔뜩 기대했던 부다페스트가 단지 1박 2일밖에 없어서 조금 섭섭했는데 사실 야간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관계로 오늘 하루가 온전히 보장되니 사실은 2박 3일 일정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어제 야경까지 다 보고 나니 오늘은 새로운 무엇인가를 보기는 힘들 것 같고 어제 부다의 왕궁의 언덕을 다 보았으니 오늘은 주로 페스트 지역에서 마지막 날을 보내고 어제 봐 두었던 도나우강 유람선을 타고 부다와 페스트 양쪽을 관망하는 시간을 가지기로 계획을 짰다.
호텔에 아침 뷔페가 있어서 이곳에서 조식을 했다. 식사는 1인당 5유로씩으로 저렴하였고 가격 대비 나쁘지 않은 식사였다.
식사 후 10시경 호텔을 체크아웃하였다. 다행히 호텔에서 우리 짐을 맡아 주기로 해서 가벼운 복장으로 시내 구경을 나갔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중심가로 가서 번화가인 바치 거리를 서서히 걸어 다니면서 아이쇼핑과 많은 사람들 구경을 했다. 그곳에서 도나우 강변 쪽으로 나와서 강변을 걸어서 북쪽으로 걸어갔다. 이 강변에 5성급의 고급 호텔들이 늘어서 있었고 올려다보니 모든 객실이 river view였다. 식당 야외 테라스에는 몇몇 사람들이 도나우 강을 바라보면서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지금의 내 처지(?)에서는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부자들 같아 보였다.
강변을 걷다 보니 도나우 강 유람선 선착장이 나왔다.
요금은 인당 9유로씩이고 시간은 약 1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유로화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많은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해서 이런 곳에서는 유로화 사용이 가능했다.
유람선을 타고 도나우 강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양쪽 지역을 모두 볼 수 있었고 어제 건넜던 세체니 다리 밑으로 오니 왼편 부다 지역으로는 어제저녁에 우리가 있었던 왕궁의 언덕이 보이고 오른쪽의 페스트 지역에는 어제저녁에 강 건너편에서 야경으로만 보던 국회의사당 건물이 보였다.
어젯밤 야경으로 보던 건물들을 낮에 밝은 태양 아래에서 보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이었고 특히 도나우 강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더더욱 운치 있었다. 다만 문제점은 지금 태양이 너무 뜨거워서 배위에 있는데도 힘들었다.
유람선 관광을 마지막으로 오후 4시경 모든 부다페스트 관광을 마무리하고 호텔로 돌아와서 어제 식사하였던 근처 Ba bar에서 저녁식사를 하였다. 어제와 다른 메뉴를 시켜서 먹어 보았는데 역시 너무 훌륭했다. 이번 부다페스트 여행에서 이 식당에서의 식사가 헝가리 음식을 제대로 느끼게 해 주었는데 이것 역시 소중한 추억 가운데 하나였다.
호텔에서 우리의 짐을 찾아 역으로 향했다.
야간열차는 오후 8시 5분 출발이었는데 막상 타려고 보니 지금까지 우리가 탔던 1등석의 깨끗한 차량과 달리 거의 2차 세계 대전 때 영화에서나 본 포로들을 실어 나를 것 같은 그런 남루한 차량이었다. 내부로 들어가니 복도가 이어져 있고 왼편으로 방들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는데 방에 들어서자 너무 작아서 깜짝 놀랐다. 더욱 놀란 것은 이 좁은 방에 한쪽 면에 3개씩 작은 침대가 3층으로 붙어있는 즉 6명이 자는 곳이었다. 안 좋은 상상을 하고 탔는데 어떤 상상을 하던 그 이상으로 안 좋았다. 내부는 달구어진 컨테이너 박스 안 같이 찜통이었다. 아마 기차가 달려야 에어컨이 가동될 것 같았다. 마침 승무원이 지나가길래 언제 에어컨을 트느냐고 물어보자 상당히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이 기차는 워낙 옛날 것이어서 에어컨이 없다고 한다. 창문을 열려고 해도 낡은 창문은 꿈쩍도 안 했다. 순간적으로 많은 악재가 순차적으로 터지자 우리 3명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들은 또 어쩔 줄을 몰라했는데 아들 역시 이번이 야간 기차 첫 경험인데 미안해할 이유가 없었다. 우리 3명 말고 캐나다에서 여행 온 2명의 여대생이 또 있었고 아직 한 명은 나타나지 않았다. 우선 아쉬운 대로 이렇게 5명만 가기를 바랐다. 이 좁은 찜통에서는 1명이라도 없는 것이 그나마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여행객들은 각자 큰 가방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데 이 방에는 구조적으로 큰 가방 6개가 들어갈 공간이 없다. 할 수 없이 각자 가방을 침대 발 있는 쪽으로 올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작은 침대에 큰 가방이 눕혀지자 그 위에 다리를 올리고 누워 자는 수 밖에는 없었다.
대충 이렇게 정리하고는 복도 쪽으로 나왔다. 복도에는 그나마 창문들이 열려 있어서 방에 비해서는 시원했다. 나는 웬만하면 방에 들어가지 말고 이 복도에서 시간을 보내며 밤새 갈 생각을 했다. 하루 저녁 못 잔다고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닐 것이고 이미 포르투갈에서 뜬 눈으로 밤을 새운 경험도 해 보았고 겁날 것이 없었다. 거의 멘붕 상태로 복도로 나온 아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위로해 주었다.
기차가 거의 출발하려고 하는 순간 내 기대와는 다르게 우리 방의 마지막 승객이 탑승했다. 아르헨티나에서 프랑스에 유학 온 학생인데 방학을 맞이해서 유럽 여행 중이라 한다. 어느덧 기차가 출발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아내와 아들 그리고 캐나다 여학생 중 한 명은 방에서 잠이 들었고 나와 아르헨티나 그리고 캐나다 여학생 이렇게 셋이서 복도 창문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기차가 달리니 이곳 복도는 창문을 통해서 시원한 바람이 들어와서 살 것 같았다. 셋이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다 캐나다 여학생이 퀘벡에서 왔다고 하니 아르헨티나 학생이 프랑스 유학중 배운 불어를 해보고 싶다며 둘이서 불어로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뻘쭘해진 나는 가만히 서 있었고 이런 나를 의식했는지 다시 영어로 언어를 바꾸려 하기에 둘이 이야기하라고 자리를 비켜줄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더해서 내가 보기에는 이 캐나다 여학생이 아르헨티나 남학생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얼른 자리를 피해 주려다 보니 방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방에는 그동안 누가 힘을 썼는지 창문이 열려 있어서 제법 시원했다. 좁은 공간에 몸을 웅크리고 잠을 청했다. 이런 악조건 하에서도 새벽에는 제법 깊은 잠을 이룰 수 있었다. 이제 나도 배낭여행에 상당히 적응이 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