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파리의 마지막 날이다.
아주 많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여러 번 온 것 같은데 파리는 올 때마다 늘 새로웠고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던 것 같다. 8월 초의 불볕더위는 이번이 첫 번째 경험인 것 같은데 상당히 힘이 들면서도 파리가 주는 묘한 매력은 이 모든 것을 극복하게 해주는 마력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사실 프랑스인들 아니 파리 사람들이 그렇게 외국인에게 먼저 다가올 정도로 친화력이 있는 사람들 같지는 않고 여느 남유럽 국가들과 공통사항인 영어가 잘 통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친절한 것 같지도 않고, 유적지도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같이 넘치지도 않는 편이지만 그래도 무언가 과거와 현재 그리고 그 외의 것들도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느낌이다.
유럽의 도시들은 개별적으로 방문할 때 아름답지 않은 곳은 없다. 또 깊은 인상을 남긴다. 하지만 이번 같이 여러 도시들을 다닐 때에는 서로 비교가 되는데 나의 경우 단연 파리와 영국의 런던이 우위에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 친구들 중 파리와 런던에서 공부를 했거나 직장일로 근무했던 사람들은 나의 이런 이야기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 오랜 기간 거주하면서 그 도시에 대한 느낌은 보통 다 무덤덤해 지기 마련이다. 우리가 서울에 대해서 큰 느낌 없이 살아가듯이.
파리, 런던 다음으로는 스페인의 마드리드, 이탈리아의 밀라노 정도가 비슷한 느낌으로 좋은 인상을 주었다.
물론 이번에 경험한 베네치아는 감동 그 자체였고...
오늘은 저녁 8시 20분 비행기로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떠나는 날이다. 따라서 오후 6시까지는 공항으로 가야 하고 그러다 보니 오후 3-4시경에는 파리 여행을 마무리하여야 할 것 같다.
아들은 오늘 일정을 숙소 바로 앞이라 그동안 지나쳐왔던 루브르 박물관을 보고 옆의 튀를리 공원과 콩코드 광장에서 여유 있게 시간을 보내면서 파리의 분위기를 마지막으로 느끼자고 한다고 했다.
우리 다음으로 이 숙소에 올 사람이 아직은 없는지 집주인은 우리에게 짐을 두고 여행했다가 오후에 다시 가지러 와도 좋다고 양해를 해 주었다.
집주인은 날이 너무 더워지자 어제 밤 같이 밤새 떠들던 친구들과 바닷가를 간다고 일찍 나섰기 때문에 숙소에는 우리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마음 편하게 늦잠도 자고 하면서 어제의 피로를 풀었고 11시경 짐을 다 싸서 놓고 숙소를 나왔다.
이곳은 루브르 박물관이 있는 중심가다 보니 괜찮은 식당들이 너무 많았다. 메뉴들을 둘러보다가 마음에 드는 곳으로 들어가서 브런치를 즐겼다. 식사를 하면서 아들과 파리에 대한 생각을 물어보았는데 나와 똑 같이 너무 좋았었다고 이야기했고 앞으로도 유럽 올 일이 있으면 파리는 한 번씩 들를 것 같다는 이야기도 했다.
식사비는 파리에서 3일 내내 그렇듯이 40유로 정도였다.
식사 후 바로 지척에 있는 루브르 박물관으로 갔다.
루브르 박물관은 세계 3대 박물관 중의 하나이며 그 명성에 걸맞게 방대한 양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 건물은 원래 요새로 지어졌다가 샤를 5세가 거처하면서 왕궁이 되었던 곳이다. 그 후 프랑수와 1세 때 왕실 소유의 미술품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사실 지금의 루브르 박물관은 오랜 세월을 두고 확장 공사를 하면서 완성된 것인데 이를 채우기 위하여 나폴레옹이 전쟁에서 약탈한 예술품과 그 후 해외 예술품의 대대적인 매입을 병행하였다. 사실 유럽에 와서 박물관을 볼 때마다 이들이 전시하고 있는 것들이 전쟁에서 약탈한 예술품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리곤 한다. 내가 아는 한 미국 뉴욕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과 러시아 상테 뻬제르부르크에 있는 여름궁전인 에르미타주 박물관은 약탈품이 없고 다 돈으로 매입한 것이라 한다. 참고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예술품들 중에는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온 것들이 많다고 한다. 미국이 약탈한 것이 아니라 프랑스 경제가 안 좋았던 시절 미국에 많이 팔았다고 한다. 또 많은 도둑들이 훔쳐서 미국에 팔기도 했고...그러다 보니 메트로폴린탄 박물관의 경우 예술품을 구매해서 전시하는데 거의 우리나라 1년 예산에 버금가는 비용을 썼다고 한다.
루브르 박물관은 1989년에는 박물관 앞에 유리 피라미드를 세우면서 대 변신을 하게 되는데 그 당시에는 이 유리 피라미드가 박물관의 고전적인 모습과 어울리지 않고 또 유리가 떨어져 사고의 위험이 있다는 등의 이유로 많은 반대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에는 이 유리 피라미드가 이 루브르 박물관의 상징이 되어 버릴 정도로 유명해졌다.
이 유리 피라미드는 마름모꼴의 유리 666개가 조립되었다고 하며 이 피라미드 주위에는 작은 크기의 소형 피라미드 3개와 분수가 자리 잡고 있다.
이 해 여름에 중국인 관광객들이 신발을 벗고 이 분수에 걸터앉아서 분수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고 해서 뉴스에 크게 나온 사건이 있었다.
이곳에서 아들과 같이 사진을 찍기 위하여 다른 관광객에게 부탁을 했는데 사진을 찍어준 후 이 관광객이 우리에게 어떤 관계냐고 물었다. 부자 지간이라는 것을 알고는 놀라기도 하고 부러워하기도 하였는데 본인은 영국에서 왔다고 했다. 우리가 한국인이라고 하자 바로 ’ 박지성’을 이야기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행이 길어지면서 아버지와 아들 둘만의 배낭여행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을 생각보다 많이 만나게 되었다.
이날도 루브르 박물관의 내부를 보기 위한 줄은 엄청났었는데 다음에 오면 다시 한번 내부를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부에 들어가 본 지도 벌써 20년이 다 되어 가는 것 같았다.
이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후 옆의 튀를리 공원으로 갔다.
이날이 토요일이라 그런지 첫날 도착했을 때와는 다르게 이 공원은 거의 놀이동산으로 변해 있었다. 사람들도 상당히 많아서 평일의 한산하고 조용했던 곳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여러 먹을거리를 파는데 그중에서도 츄러스가 상당히 크고 먹음직스러워서 하나씩 사 먹고 구경하고 있었는데 공중을 회전하는 아찔한 놀이기구가 있었다. 아들은 타고 싶어 해서 타고 이런데 전혀 관심이 없는 또 공포감을 느끼는 나는 구경만 했다. 어떻게 이런 것을 타고 좋아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들은 같이 탄 사람들도 약간 무서워하는데도 혼자 공중에서 손을 번쩍 들면서 정말 재미있게 이 놀이기구를 즐겼다.
이곳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토요일 오후 파리 시민들의 여가 즐기는 모습을 제대로 구경했다.
다시 이곳에서 옆의 콩코드 광장으로 갔는데 여기서는 첫날과 마찬가지로 페라리나 람보르기니 등의 스포츠 카를 요금을 내고 20분 정도 운전할 수 있는 장사를 하고 있었고 콩코드 광장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구경하고 있었다.
서서히 걸어 다니면서 파리의 마지막 순간을 즐겼고 많은 사람들의 구경은 필수였다
.
이제 시간이 되어서 숙소 방면으로 걸어오면서 레스토랑에서 점심으로 피자를 먹었는데 이것이 파리에서의 마지막 식사였다.
식사 후 숙소로 돌아오니 이 날의 더위 때문에 아들과 나는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샤워를 한 후 챙겨둔 짐을 가지고 나왔다.
우리는 덴마크의 코펜하겐에 가는 비행기를 타야 했는데 샤르 드골 공항으로 가야 했다. 아들이 오페라 전철역에서 공항 가는 버스가 있다고 해서 갔는데 파리의 전철은 모두 계단으로 되어 있고 에스컬레이터가 없어서 첫날에도 큰 짐을 들고 전철 타는데 상당히 고생을 했다. 그래서 한 정거장이니 걸어가기로 했다. 큰 짐을 들고 계단을 힘들게 오르내리는 것 보다는 차라리 걸어가는 것이 더 편할 것 같았다. 그런데 한 정거장이지만 거리가 상당히 되어서 큰 짐을 굴리면서 가는 것도 그리 쉽지는 않았다.
오페라 역이 있는 광장에 도착하자 어느 곳에 버스가 있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혼잡하고 붐볐다. 아들이 이곳저곳을 다니며 알아보고 있었는데 내가 큰 짐을 가지고 서 있자 근처의 많은 관광객들이 나한테 몰려와서 공항 가는 버스를 어디서 타는지 물어보는 것이었다.
모두들에게 잠깐만 기다리라고 했다. 아들이 곧 알아 올 테니까. 내 말을 듣고 모두들 웃으면서 같이 기다렸는데 아들이 와서 앞장서서 가니 제법 많은 여행객들이 줄을 맞추어서 따라왔다. 모르는 사람들이 봤다면 많은 유럽 여행객들을 인솔하고 가는 한국인 가이드로 알았을 것 같다. 공항 가는 여러 종류의 버스가 있는 것 같았는데 우리가 타고 간 버스는 르와시(Roissy) 버스였다.
버스에 타니 우리를 뒤따라와서 같이 탄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아들한테 와서 고맙다는 인사를 해서 영문도 모르는 아들은 어리둥절 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나한테 고마워했었는데 아들이 모든 것을 했지 나는 전혀 공헌한 바가 없다는 것을 눈치챈 것 같았다.
공항이 가까이 오자 나는 아들한테 몇 번 터미널이냐고 물었는데 아들은 대답하지 못하였다. 사실 터미널끼리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서 정확한 터미널에 내려야 하는데 아들이 미처 신경 쓰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런데 초행길도 아니고 한 번 다녀온 아들이 이런 실수를 한 것이 스스로 자존심이 상했는지 아니면 마지막 날 파리의 더위에 너무 지쳐서 그런지 나한테 심하게 짜증을 내는 것이었다. 나도 역시 몸이 너무 피곤했는지 예민해져 있었다. 정말 그동안 잘 참고 지내다 이 순간은 제어가 안 되었다. 폭발 직전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이 순간을 잘 참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정말 잘 참았던 순간이었다. 만일 이때 폭발했더라면 그동안 여러 번의 고비를 아무리 잘 넘겼어도 다 무위로 돌아갈 뻔했다. 아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들이 듣기에 내가 그것도 챙기지 못했냐는 비아냥 섞인 기분 나쁜 어조로 물어보았다고 느낄 수도 있었을 것이고.
이미 몇 번의 고비가 있었지만 이때가 고비의 최고점이었을 것이다.
결국 이 고비를 무사히 넘겼는데 정말 지나 놓고 보면 잠깐만 참으면 되는 것인데 그 당시는 왜 그게 그렇게 힘든 것인지 모르겠다.
우리가 타고 갈 비행기가 SAS였고 이 비행기가 몇 번 터미널에 있을까 한 번 찍어보고는 3번 터미널에서 내렸는데 확인해 보니 1번 터미널이었다. 직감을 믿기에는 너무 육신이 지쳐있었던 것 같다. 1번 터미널까지는 공항 셔틀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공항에서는 자동발매기를 이용해서 모든 절차를 마치고 보딩 패스를 받았다.
이제 8시 20분에 비행기를 타면 나와 아들의 첫 경험인 코펜하겐으로 날아갈 것이다.
정든 파리와도 이쯤에서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우리를 너무 힘들게 했던 살인적인 더위와도 작별을 고했다.
첫번째 파리와의 작별은 아쉬웠지만 두번째 더위와의 작별은 전혀 아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