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밤의 피곤함도 잊고 드디어 이번 여행의 첫날이자 바르셀로나에서의 첫날이 시작되었다. 늦잠을 잘 줄 알았던 아들도 생각보다 일찍 일어나서 첫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샤워를 할까 하고 욕실에 가 보았는데 정말 욕조가 너무 작고 좁아서 불편했고, 특히 등에 비누칠을 하거나 머리에 샴푸를 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을 정도였다.
어서 이 집만 벗어나면 이런 불편함에서 해방될 줄 알았는데 그 후에 마드리드에서도 좁은 욕실은 똑같았다. 여행을 오면 항상 호텔에서 생활하면서 뭔가 유럽의 호텔은 다른 나 라에 비하여 불편하다고 생각하였는데, 이들의 보통 사람들이 생활하는 집들의 구조가 이러하였다. 대체적으로 체구가 큰 이들이 이런 공간에서 어떻게 제대로(?) 씻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유럽에서 길을 다니면서 거의 100년은 되었을 돌로 된 고색창연한 건물을 보면 그 안은 어떻게 생겼을까 하고 궁금했었는데, 외부의 모습과 똑같이 내부도 고색창연(?) 하였다.
사실 한국의 전통가옥도 목욕하기에는 힘든 구조였다. 얼굴만 닦고 양치만 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 우리는 이런 집들이 다 헐리고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빠르게 욕실 문화가 바뀌었는데, 과거 집들이 그대로 있는 이들의 생활은 현재 살아가기에는 상당히 불편할 텐데 그럭저럭 적응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리라. 그들이 이 좁은 공간에서 어떻게 그 큰 몸을 비누칠하고 씻어 내는지 비법(?)을 배우고 싶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특징은 출입문 열쇠가 현재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나도 아주 어렸을 때 보았던 크고 여러 번 시도해야 겨우 열리는 그런 것들이다. 여행 중 열쇠를 소지하고 다녀야 할 때 그 무게와 크기도 상당해서 항상 불편했는데 아들의 경우는 이런 열쇠를 전혀 본 기억이 없다고 한다. 열쇠를 소지하고 문을 여 닫는 것은 아들이 도 맡아서 한 관계로 나는이 불편함에서 해방되었지만 무거운 열쇠를 사용해서 문을 열 때 끙끙대는 것을 보면 이 아들이 없었으면 나 혼자 너무 힘들었겠구나 하고 생각되었다.
어제저녁에 만나지 못한 집주인은 아침에도 보이지 않았고, 다른 방에는 외국인 남자 혼자서 묵고 있었다. 준비를 마치고 밖에 나오니 일단 살 것 같았다. 시간도 아침 9시여서 첫날의 시작은 아주 양호하였다.
앞서 이야기 한대로 이번 여행의 리더는 아들이었으므로 바르셀로나 초행인 사람(아들)이 두 번째인 사람(나)을 가이드하는 일이 일어났다. 아들이 오늘 일정에 대하여 나한테 이야기해주었고 나의 답은 항상 같았다. ‘너 혼자 여행한다고 생각해라. 아빠는 투명인간으로 취급하면 된다.’ 그래도 조언을 부탁하면 한 가지만 건의(?)했다. 일단 걸어서 도시를 투어하고 마지막 날에는 도시 투어 버스를 타고 우리가 다녔던 곳을 다시 한번 리뷰하고 혹시 놓친 곳이 있으면 내려서 둘러보고…
여기서 도시 투어 버스란 서울에도 있는 시스템으로 2층 버스인데 2층은 지붕이 없는 오픈카 스타일의 버스다. 노선을 따라 돌면서 계속 안내 방송이 나오고 정류장마다 내리고 싶으면 내려서 구경하고 (그 친구들은 이 버스시스템을 Pop-on Pop-off system이라 한다) 다시 그 자리에서 다음 버스를 타면 된다. 안내방송은 여러 나라 말이 있는데 아쉽게도 아시아 권에서는 일본어와 중국어만 제공된다. 우리는 영어로 듣는 방법 밖에는 없다. 나중에 유럽 다른 도시에서는 간혹 한국어가 제공되는 곳이 있는데 내 경험으로는 대표적으로 이탈리아의 로마 시내 투어 버스가 한국어 제공이 되었다.
그리고 특이하게 파리 센 강의 유람선에서 한국어가 제공된다. 아마 그만큼 이 곳에는 한국인이 많이 방문하는 모양이다.
바르셀로나 하면 바로 떠오르는 것이 천재 건축가 가우디이다. 따라서 바르셀로나 여행은 가우디가 남긴 건축물을 구경하는 것이 거의 전부이고, 내 아들같이 축구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세계적인 명문 클럽인 FC 바르셀로나 구장을 투어 하면 좋은 추억을 가질 수 있다. 이 아이디어도 내가 주었는데 아들도 축구장 투어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는지 너무 좋아했다.
아들이 숙소에서 나와서 카탈루냐 광장으로 씩씩하게 걸어간다. 골목을 지나면서 어제 밤에는 어두워서 미처 보지 못한 많은 상점들이 눈에 띈다. 나도 모르게 눈으로 빠르게 스캔하면서 폭풍 아이쇼핑을 하고 있는데 앞서 가는 아들도 보니 나와 똑같이 시선을 여기저기 뺏기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관심이 가는 곳에서는 좀 더 시선이 집중되기 마련인데 나와 아들이 시선이 머무는 곳이 거의 같은 곳이었다. 이것도 유전인가 보다.
아들은 카탈루냐 광장에서 동서남북을 파악하고는 방향을 남쪽으로 잡더니 거침없이 콜럼버스 탑을 향하여 걸어가기 시작한다. 어릴 때부터 그랬지만 아들 녀석은 방향 감각이 탁월할 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감각이 좋고 행동도 빠르고 그러면서도 빈틈이 없었다. 여기서도 초행길임에도 바로 찾아 가는 것을 보고는 내 입에는 아마도 미소가 번졌으리라.
카탈루냐 광장은 바르셀로나 시내의 중심지이다. 유럽의 많은 도시들과 같이 스페인 역시 광장을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중심지인 이곳은 상당히 번화하고 또 넓다. 이 광장 남쪽 방향 가장 비싸 보이는 건물 옥상에 삼성전자 광고판이 상당히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외국에 나가면 애국자 된다고 무언지 모를 뿌듯함이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나중에 카탈루냐 광장에 앉아서 쉴 때 주변을 보면 대부분의 바르셀로나 인들이 삼성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들이 앞장서서 걸어가고 있는 이 길이 그 유명한 람브라스 거리이다. 2년 전에 왔을 때도 참 인상적이었는데 월요일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인파가 장난 아니었다. 여름휴가철이 시작되면서 수많은 관광객이 벌써 바르셀로나를 가득 채우기 시작한 것이다.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많은 특이한 노점상들과 길거리 잡상인들과 행위예술을 하는 사람 등등 아들은 정신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즐거워했다. 여기가 아마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번화한 길이고 주말이 되면 걸어갈 수 없을 정도로 인파가 밀린다고 설명해 주고 특히 소매치기 조심하라고 이야기했다. 우리 여행의 첫 시작점인 이 도시 바르셀로나를 아들이 좋아하는 것 같아서나도 안심이 되었고 같이 기분이 많이 업 되었다.
약 30분 정도를 걸어 내려가면 레이알 광장이 나온다. 가로등이 상당히 특이했고 또 멋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여행안내 책자를 한 손에 끼고 보던 아들이 이 가로등이 가우디가 만든 최초의 작품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단순히 특이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가우디 작품이라고 하니 한 번 더 눈길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맞은편에 구엘 저택이 있는데 2년 전에 비하여 영 사람이 없었다. 아들이 뛰어갔다 오더니 월요일은 내부 구경이 안 된다고 한다. 할 수 없이 외부만 구경하고 사진도 찍고 다시 오던 길을 되돌아 올라가서 까사 바트요를 간다고 했다. 가는 도중 10시경 배가 고파서길에 있는 샌드위치 집에 들어가서 늦은 아침 겸 이른 점심 식사를 했다
다시 아침의 시작점인 카탈루냐 광장으로 와서 이번에는 북쪽으로 다시 걸어올라 갔다. 그러면 그라시아 거리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곳에 가우디의 건축물인 까사 바트요와 까사밀라가 인접해 있다.
먼저 만난 까사 바트요는 정말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5년 전에 처음 봤을 때 보다는 감동이 떨어질 줄 알았는데 다시 보아도 아름다웠고 건물 외벽 처리가 특이했고 적당한 곡선들이 살아 있어서 몇 번이나 다시 보게 되었다. 이 건물은 바트요라는 사람이 가지고 있던 개인주택인데 이 사람이 가우디에게 요청해서 가우디가 리모델링을 한 건축물이라 한다. 100년 전인 그 당시에는 디자인이 특이해서 해골 집 또는 뼈다귀 집이라 불렸다고 한다. 지금 보아도 특이한 건축물인데 그 당시에는 정말 너무 특이해서 악평도 많이 받았을 것 같다. 이미 이 건물을 둘러싸고 긴 줄의 인파가 있었다. 아마도 건물 내부와 옥상을 구경하는 투어 줄인 것 같은데 성격 급한 아들이 이 줄에 서서 약 1시간 정도를 소비하리라고는 애초에 기대가 없었기에, 아들이 그냥 가자고 할 때 전혀 놀랍지 않았다.
거기서 그라시아 거리를 걸어서 조금 더 북쪽으로 걸어가면 까사밀라를 만나게 된다.
이 건물은 까사 바트요 다음에 만들어진 집으로 밀라라는 사람이 까사 바트요를 보고 반해서 가우디에게 요청해서 만든 집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까사 바트요를 보고 많은 감동을 했는데 까사밀라를 보는 순간 까사 바트요는 잊어버리고 이 건물에 집중하게 된다. 그만큼 아름답고 특히 모서리가 없고 다 둥글둥글하게 곡면 처리되어있어서 정말 100년 전에는 거의 혁명적인 디자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재료가 석회암과 철인데 이것을 이용해서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곡선을 만들었는지 가우디의 천재성이 여실히 드러나는 작품인 것 같다. 역시 입장료가 비싼 관계로 아들은 내부 구경을 안 했는데 내부도 모서리가 모두 곡면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가구 배치하기가 힘들지 않았을까? 그리고 건물 가운데가 뚫려 있어서 모든 방들이 햇빛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라시아 거리에는 이 두건 물 말고도 아름다운 건물들이 사방에 있어서 눈을 호강시켜 주는데 그중에서도 역시 백미는 까사 바트요와 까사밀 라이다.
까사밀라를 보고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가면 바르셀로나의 상징이자 가우디의 대표적인 작품인 싸 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만나게 된다. 워낙 높은 건물이라 걸어가면서 부분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는데 이때부터 탄성이 나오기 시작한다. 막상 앞에 가면 항상 수많은 인파와 앞의 공간은 제한적인데 건물의 높이는 상당히 높아서 사진 앵글을 잡기가 수월하지 않다. 길 건너편에 조그만 공원이 있는데 이곳에서 멀찍이 바라보는 것이 사진 찍기도 용이하고 사람들도 없고 편안히 앉아서 볼 수 있어서 좋다.
이 공사는 원래 1882년에 비야르라는 건축가에 의하여 진행되었는데 1년 후 31세의 젊은 나이인 가우디가 맡게 된 것이라 한다. 그 당시 가우디는 이 공사에 집중하면서 현장에서 아예 숙식을 할 정도였다고 하는데 1926년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 당시 어찌나 행색이 남루했는지 처음에는 가우디인 줄 모르고 어느 노숙자가 죽은 줄 알았다고 하니… 이 천재 건축가의 말로는 이렇게 초췌했는데 그가 남긴 작품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바르셀로나를 대표하는 건축물이 되었으니 정말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든다.
4개의 기둥의 모양이 특이해서 옥수수 같다고 하는데 내 눈에는 우리나라의 죽부인을 길게 늘여서 만든 것 같아 보였다. 사진에서 보는 것보다 현장에서 직접 보면 훨씬 더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5년 전 아내와 같이 왔을 때는 긴 줄을 한참 기다려서 내부를 관람했는데 그야말로 공사의 현장으로 볼 것은 하나도 없어서 허망했던 기억이 있었는데, 아들과 함께 온 지금은 관광 철까지 겹쳐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내 나름대로 아들한테 좋은 정보를 준답시고 저 안은 현재 공사 중 이어서 볼 것 도 없고 저 사람들 오랜 시간 기다리고 들어가서 엄청 실망할 거라고 이야기했다. 웬일인지 이 곳 내부는 시간이 걸려도 들어가 보고 싶어 하던 아들은 내 이야기를 듣고 포기했는데,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어느 날 인기 프로인 ‘꽃보다 할배’ 스페인 편을 보다가 내부가 공사가 마무리되어서 볼만 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들한테 많이 미안했는데… 하긴 아직 젊으니 앞으로 또 갈 기회가 많을 것이다.
이곳은 사진에서 보듯이 아직도 공사 중이다. 언제 끝날 지 모른다고 하는데 나는 스페인 사람들이 게을러서 그런 줄 알았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정주영 회장이 하면 몇 개월 안에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나중에 어느 자료를 보니 아직도 공사 중인 이유가 100년 전 가우디의 설계와 시공방식으로 그대로 진행하느라고 그렇다고 한다.
이제 아들이 오늘의 마지막 일정으로 구엘공원을 가자고 한다. 오전 내내 걸어 다녔기 때문에 지하철을 탈 줄 알았는데 역시 이동수단은 도보라고 한다. 아마 ‘꽃보다 할배’에 나오는 백일섭 씨였다면 벌써 우리 아들을 한대 때리지 않았을까 싶다. 아들과 나는 모두 걸음이 상당히 빠른 편이다. 조금 과장하면 경보 수준일 것 같은데 그래서 그런지 아침 일찍 서두른 것도 아닌데 3-4시간 만에 2년 전 아내와 하루 걸렸던 일정을 다 소화한 것 같다. 내가 그나마 체력이 가능하니깐 그렇지 다른 보통의 아버지 들이라면 …
그래도 가는 길에 피자 2조각과 콜라 한잔을 마셨는데 이것이 체력을 비축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북쪽으로 한참을 걸어 올라가니 오후 2시경 구엘공원에 도착했다.
원래 이곳은 가우디의 경제적 후원자였던 구엘이 60여 채의 고급 주택을 만들어서 바르셀로나의 상류층을 대상으로 분양하려고 했던 곳이다. 요즘 한국으로 따지면 고급 빌라에 해당한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 당시로는 꽤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방법이었던 것 같은데 결국은 실패에 그친다. 도중에 구엘이 사망해서 경제적인 지원이 없었던 탓도 있겠지만 자연 그대로를 살리겠다는 가우디의 완벽주의에 의하여 공사기간이 자그마치 14년이 걸렸으니 아마 건설에 대해 조금이라도 지식이 있으신 분들은 망할 수밖에 없는 사업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몇 개의 건물과 광장, 유명한 벤치 등만 남기고는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였는데, 바르셀로나 시에서 1922년 이곳을 사들였고, 다음 해에 시영 공원으로 탈바꿈시켰다. 어떤 자료에는 구엘의 아들이 흉물로 남은 이곳을 시에 기부했다고도 되어 있다.
그 당시로는 완전히 망한 사업이지만 지금은 바르셀로나의 유명한 관광지가 되어서 엄청난 관광수입을 올려주고 있으니, 아마도 가우디 입장에서는 그 당시 하는 일마다 경제적으로는 되는 일이 없었을 텐데 아마도 하나님께서 가우디한테 맡긴 사명은 그 당시의 경제적인 이득을 넘어서는 후대에 길이 남을 불후의 작품들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을까?
또 그 당시 이 사업이 성공했었다면 소수 부유층 60인 만의 공간으로 남았을 테지만 현재는 바르셀로나의 모든 사람들뿐만이 아닌 세계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고 감동받을 수 있으니 더 위대한 성공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사람들은 일을 할 때마다 그 일이 잘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곤 하는데 잘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가 많다. 그때마다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좌절하기도 하는데 우리가 모르는 보다 원대한 뜻이 있다고 믿고 겸허한 마음으로 더 나아가서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이 필요한 것 같다.
공원 입구에 동화 속에 나오는 과자의 집을 연상시키는 2개의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이 경비하는 사람의 거처였다고 한다. 이 공원을 보아도 가우디의 특징이 또 나타난다. 직선이 아닌 곡선을 이용한 건물, 색상이 화려한 모자이크 장식과 타일이 절로 감탄을 자아내며, 그리스 신전같이 기둥이 많은 신전 역시 천장이 곡선을 이루고 있다.
오후 4시경 이곳을 마지막으로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한다고 한다. 첫날이라고 많이 봐주는 것 같이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앞으로 남은 50일 이상의 여행이 내 마음을 은근히 압박하는 기분이다.
아들이 혼자 다니는 배낭여행이 어떤지 직접 몸으로 체험해보니 많은 이해가 되었다. 첫째도 둘째도 경비 절약일 정도로 돈 쓰는 것에 예민했고 어차피 아들 여행에 내가 동행한 것이니 아들 의견에 100% 따르기로 했다.
이젠 아들도 체력적으로 힘들겠다 싶어서 당연한 듯 아들에게 ‘갈 때는 지하철 탈 거지?’ 했더니 잠시 뜸을 들이던 아들의 대답은 ‘걸어가죠, 뭐’
유약한 아들은 부모에게 마음의 걱정거리이지만 강인한 아들은 부모에게 육체적으로 걱정을 끼친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