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몇 년 전 아내와 함께 바르셀로나에 처음 갔을 때 우리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가기 전부터 스페인을 간다고 하면 모든 사람들이 하는 첫 조언은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이야기였다. 상상을 초월하는(?) 묘기를 지니고 있다는 말부터 아무리 조심해도 순간을 놓치지 않는 그들의 기법에 당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부터…
그래서 현지에 도착하자 우리도 여러 대응 전략을 세워야 했다. 참고로 이야기하자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몇몇 지역을 방문할 때 이런 이야기들이 단골 멘트로 나오는 곳이 있다. 물론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겠지만 너무 여기에 신경 쓰느라 즐겨야 하는 여행에 지장을 준다면 그 역시 그다지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내 경우는 약 30개국 이상을 다녔음에도 한 번도 이런 봉변을 당해본 적이 없다. 사실 한국도 정신 차리지 않고 다니다 보면 이런 일을 당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한국에서도 별문제 없이 정신 차리고 다니는 사람은 해외에서도 거의 사고가 없다.
아무튼 그 당시 내가 수립한 전략은 다들 아시겠지만 돈을 조금만 가지고 다니고 또 이 돈도 한 군데에 넣어 다니지 않고 여러 곳에 분산해서 가지고 다녔으며 비상금은 따로 양말에도 넣어서 다녔다. 그리고 어디를 가든 관광객처럼 두리번 거리지 않고 현지인 같이 당당히 다니면 당연히 소매치기의 눈길을 피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이런 전략은 첫날 무참히 망가졌다. 지하철을 타기 위하여 티켓을 사야 하는데 자동판매기에서 조금 시간을 지체하자 바로 지나가던 현지인 여러 사람들이 다가왔다. 도와주겠다고 온 것 같은데 알 수 없는 스페인어로(정확히는 카탈루냐어) 마구 떠드는 것이었다. 스페인어를 모른다고 말해도 막무가내로 지하철이 떠나갈 듯이 큰 목소리로 쉴 새 없이 이야기했다. 이들의 천성인 것 같았다.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고(물론 좋은 의미) 자기가 도울 수 있는 일에는 열정적으로 다가와서 상대방이 스페인어를 알아듣던 말던 본인의 영어가 되던 안 되던 적극적으로 다가온다. 덕분에 내가 현지인이 아닌 관광객이라는 것이 만천하에 공개되었고…
결국 어떤 할머니가 우리 돈을 뺏다시피 해서(?) 티켓을 사 주었다. 그 순간도 나는 혹시 이 할머니가 소매치기 아닌가 경계하고 있었고, 내 손에 있는 돈을 나꿔 챌 때에는 하마터면 몸싸움을 할 뻔했다. 우리에게 티켓이 주어지고 상황이 종료되자 우리 주변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언제 그랬나 싶게 각자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고, 마지막 남은 어떤 분이 어디로 가는지 묻는 것 같았다. 목적지를 말하자 손짓 발짓으로 우리가 타야 할 전철의 위치까지 안내해 주었다.
그때서야 스페인 사람들이 얼마나 외국인에게 친절한지 알 게 되었는데 나중에 마드리드에 가보니 거기는 바르셀로나 같이 친절하지는 않았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면 마드리드에서는 바르셀로나 같이 남한테 대한 관심이 없었다. 물어보면 친절히 답해 주는 반면 바르셀로나 같이 먼저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만큼 스페인이라는 나라는 지역별로 문화나 정서가 너무 다르고 특히 마드리드로 대표되는 카스티야 지역과 바르셀로나로 대표되는 카딸루냐 지역은 확연히 구분된다. 워낙 여러 인종으로 구성된 나라면서 과거에는 서로 다른 왕국 이었고, 로마 멸망 후에는 오랜 기간 이슬람 지배까지 받았던 곳이라 여러 민족이 많이 섞여 있는 느낌이다. 그래서 그런지 유럽의 주요 도시들은 말로 정확히 설명할 수 는 없어도 무언가 그 지역 특유의 생김새나 몸매 등이 있는데 스페인의 각 도시에서는 어떤 평균적인 생김새를 찾기가 힘들었다. 전형적인 스페인 사람의 모습을 한국에서는 몇몇 스페인 축구 선수의 모습을 보고 상상했었는데 현지에 가보면 전혀 아니고 다들 제 각각 생긴 느낌이다.
한 번은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메인 스타디움인 몬주익 경기장을 찾았는데 우리한테는 황영조가 마라톤 금메달을 따서 유명해진 곳이지만 이곳이 북쪽 거의 끝인 관계로 지하철도 없고 해서 다운 타운까지 버스에 한번 도전해 보기로 했다. 지하철 같이 지도도 없고 또 안내 방송도 없으니 물어보는 수밖에… 상당히 만원 버스였는데 일단 버스를 타고 몇몇 사람에게 영어 할 수 있냐고 물으니 다들 모른다고 한다. 마침 아시아계로 보이는 수녀님이 계셔서 영어 가능하냐고 물어보니 조금밖에 못한다고 수줍게 말씀하셨다. 가려는 목적지를 이야기하니 자기도 바르셀로나 온지 얼마 안 되어서 잘 모른다고 하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우리 사정을 스페인어로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주위에 있던 5-6명이 도움을 주겠다고 적극적으로 토론(?)에 참여하였고 점점 목소리가 커지면서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우리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권리 쟁탈전에서 대부분 탈락하고 최종적으로 체격이 좋은 할아버지와 뚱뚱한 할머니가 결승전(?)을벌이게 되었는데 토론을 넘어서 거의 싸우는 듯 으르렁대다가 최종 승자(?)인 할아버지가 우리 안내를 맡게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수녀님이 이 할아버지가 마침 가는 방향이 비슷해서 우리를 직접 안내해 주겠다고 한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황송스럽게도 그 서비스를 받았고, 할아버지도 본인이 쟁취한 안내 역할을 하면서 상당히 뿌듯해하셨다.
이 정도면 친절의 정도가 조금 지나치다고 생각하고 웃기도 했는데, 그다음 해 가족과 강릉 경포대에 놀러 가서 회를 먹다가 마침 말이 통하지 않아서 음식점에서 어쩔 줄 몰라하던 벨기에에서 온 두 여성분을 발견하고 내가 식사가 가능하도록 도와주었다. 그중 한 분은 영어가 안되고 불어만 된다고 해서 불어가 가능했던 내 딸이 불어로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그전까지 내 딸이 아무리 불어가 가능하다고 해도 잘 믿음이 안 갔었는데 이날 이후로 나는 딸의 불어 실력에 대하여 더 이상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사실 그전까지는 이렇게까지 외국인에 대해서 친절하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는데 식사를 마친 후 먼저 가면서 마지막으로 더 필요한 것은 없는지 재차 확인해 보는 나를 발견하고는 바르셀로나 인들이 나한테 준 해피 바이러스가 나를 변화시켰구나 하고 생각했다.
혹시 이 벨지움 여성분들도 내가 바르셀로나인 들의 친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경포대에서 만난 한국인의 친절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