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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7. 군밤장수 20240307

by 지금은

며칠 전 소래포구에 갔다가 길에서 군밤 한 봉지 샀습니다.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역과 포구 사이의 길가에 점포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좁디좁은 노점입니다. 호떡, 옥수수, 뻥튀기, 커피 등입니다. 어릴 때의 군밤 맛을 생각해서 샀지만, 그때처럼 입맛을 즐겁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인공 맛에 길들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겨울이 지난봄이라서인지 모르겠습니다. 군밤 하면 겨울에 어울립니다. 지난날을 떠올리면 찹쌀떡, 군고구마도 그렇습니다. 유년기 시절에는 군고구마나 군밤 장수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산촌에서 살았으니, 도시에 가본 일이 없습니다. 자연스레 군밤을 사 먹으리라는 것도 몰랐습니다. 군밤 장수는 없었지만, 겨울이면 군밤은 가끔 먹었습니다. 뒷동산에 큰 밤나무가 많았습니다. 밤이 아람 벌어 떨어질 즈음이면 나무 밑에서 놀았습니다. 주인은 있지만 아이들에게는 내 밤도 내 밤이고 남의 밤도 내 밤입니다. 지금과는 달리 털지만 않는다면 줍는 정도야 보아도 모르는 척하는 게 시골의 인심이었습니다.


나에게 군밤의 맛이라고 하면 할머니표가 제일입니다. 온 마을이 눈에 잠긴 밤 화롯불을 다독이며 구워주시는 군밤은 군고구마와 함께 겨울밤의 주전부리 중 최고입니다. 여기에 옛날이야기까지 곁들이면 깊어져 가는 밤은 지루할 새가 없습니다. 내가 군고구마와 군밤 장수를 본 것은 서울에 살면서입니다. 손수레와 드럼통, 장작, 군용 털모자와 점퍼를 기억합니다. 통행금지 시간을 목전에 두고도 깜빡이는 가로등 아래서 손님을 기다렸습니다.


군밤을 입에 넣다가 문득 또 다른 군밤 장수를 떠올렸습니다. 우리나라에만 있을까? 밤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게 아니고 보면 외국에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생각이 맞았습니다. 러시아, 프랑스 등에도 군밤 장수가 있습니다. 프랑스 문헌에 등장하는 최초의 군밤 장수는 12세기로, 리옹에서 수도사 복장을 하고 군밤을 팔았습니다. 오베르뉴, 사부아와 같은 산간 지역에서는 동네 뒷산에서 주워 온 밤을 거리로 가지고 와 판매하는 노점상이 흔했다고 합니다.


요즘의 군밤 장수들이 굽는 군밤은 ‘공주 밤’이 대세입니다. 맛이 좋고 알이 크다는 유명세도 있지만 생산량이 많기 때문입니다. 노점에는 ‘공주 밤’이라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잠시 귀국하였을 때 군밤 장수가 눈에 띄어 한 봉지 구입했습니다. ‘공주 밤’이라는 손 글씨를 써 놓고 장사하는 할아버지 앞에는 추운 날씨에도 긴 줄이 서 있어서 그 맛이 궁금했습니다. 옥처럼 빛나는 광택을 가진 그 밤은 기대만큼 훌륭해서 집에 와 단숨에 먹었습니다. 며칠 전 파리에서 거리를 걷다가 사 먹은 군밤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같은 종류라면 국산을 찾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지 모릅니다.


요즘은 겨울에 군고구마나 군밤 장수가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붕어빵 장수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수지타산이 맞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재룟값이 오르기도 했지만 먹을거리가 많아진 세상에 현대인들이 외면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추억은 남아있나 봅니다. 붕어빵이 한동안 사라진 후로는 한동안 붕세권이라는 말이 나돌았습니다. 집을 구할 때 역세권의 중요성을 들먹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인터넷상에 붕어빵을 파는 곳을 문의하는 사람이 많고 붕어빵을 파는 곳 가까이에 사는 것을 자랑삼기도 했습니다. 한동안 인기가 좋아 카페나 커피숍에서도 붕어빵을 파는 곳이 눈에 띄었습니다. 비싸서 그럴까요. 미니 붕어빵을 판다는 문구도 발견했습니다.


파리의 가로수는 대부분이 마로니에와 플라타너스입니다. 우리나라는 서울 종로구 동숭동에 마로니에 공원이 있습니다. 마로니에 열매는 밤처럼 생겼는데 가시가 없고 열매는 통통하고 윤이 나서 먹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한때가 있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알밤으로 착각할 수 있겠다 싶습니다. 공원에서 몇 알 주워 와 창가에 늘어놓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껍질이 마르면서 윤기를 잃은 채 쪼그라들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열매엔 독성이 있어, 그냥 먹으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어느 가수가 생각납니다. 지금도 마로니에는 잎이 지고 있겠지……. 처음에는 마로니에가 뭔지 몰랐습니다. 우리말로는 칠엽수라고 불리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마로니에 숲을 지날 때입니다. 그늘이 좋다며 한 사람이 무슨 나무냐고 물었습니다. 어느 가수가 불러 유명해진 마로니에입니다. 젊은이는 그 가수를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마로니에라고 말하자 고개를 끄덕입니다. 열매가 밤을 닮았는데 독이 있어 먹으면 안 된다고 언질을 주었습니다. 먹고 싶다면 군밤을 먹는 게 좋겠다고 했습니다.


어느새 햇살이 창문을 넘어 주방 탁자를 기웃거립니다. 마로니에의 잎눈이 햇살과 만났을까요. 군밤 장수의 겨울밤을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넉넉해 보입니다. 산수유 꽃망울 터뜨리는데 밤눈은 아직도 수면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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