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6. 기다림이라는 것 20240306
‘오겠지, 오겠지.’
왔습니다.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옆에 있는 사람이 말했습니다.
“추어봤자 봄이지.”
한동안 추워 추워하며 몸을 움츠렸는데 햇살이 유리 벽을 뚫고 찾아왔습니다. 따스함이 묻어납니다. 방안의 한구석에는 작년에 구입한 선풍기가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목련이 여름부터 꽃눈을 잉태한다고 하더니만 선풍기도 곧 여름이 올 줄 알았나 봅니다.
오늘은 유난히 휘파람 소리가 목청을 높이고 콩나물이 시루에서 일시에 눈을 틔우듯 연이어 터져 나옵니다. 누가 휘파람을 요란하게 불어대느냐고요. 그게 아닙니다. 휴대전화에서 나는 소리입니다. 동호회원 중 한 사람이 남도의 매화가 만발했다는 봄소식을 알리자 너도나도 휘파람을 불어댑니다.
한라산과 강원도에는 봄을 시샘하듯 며칠 전에는 많은 눈을 퍼부었습니다. 눈을 치우는 강원도 산골 마을 노인의 모습을 보니 눈이 무릎까지 빠집니다. 찾아간 기자가 힘들지 않으냐고 물었더니만 ‘어찌하겠나, 치워야 살지 않겠어.’ 합니다. 김칫독이라도 열려면, 마을이라도 가려면 치우는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점심때가 지나니 마을 이장이 트랙터를 끌고 와서 문 앞의 눈을 밀어냅니다. 오전에는 동네의 큰길에 쌓인 눈을 치운 게 분명합니다.
빨리 오라는 마을버스는 오지 않고 병아리 같은 햇살이 유리 벽을 뚫고 까만 등에 달라붙습니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잦아들었습니다. 정류장 머리 위에 있는 알림판을 보았습니다. 버스가 차고지에서 대기 중이라는 글자가 선명합니다. 시계를 보니 목적지에 도착하려면 걸어가도 타고 가도 엇비슷한 시간에 도착하리라는 예감이 듭니다. 옆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운동할 겸 슬슬 걸어가는 게 어떻겠어요.”
고개를 흔듭니다.
혼자 발길을 옮깁니다. 길을 건너면 공원, 공원을 지나면, 또 다른 공원, 이어지는 공원이 또 있습니다. 3개의 공원을 지나가면 됩니다. 한 시간, 한 시간이면 충분합니다. 빠른 걸음이라면 40분쯤 걸리지 않을까 합니다. 시간이 나면 차를 외면한 채 종종 이 길을 걸었습니다. 이 겨울을 빼고 말입니다. 앙상한 나뭇가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쳐다볼 때마다 쓸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휑하니 뚫린 가지 사이로 눈발이라도 몰아치는 날이면 춥지 않아도 자연스레 마음이 움츠러드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발걸음을 빨리해서 벗어났습니다.
노란 태양이 나뭇가지에 걸렸습니다. 내 눈의 이동에 따라 큰 나뭇가지에도 걸리고 작은 나뭇가지에도 걸립니다. ‘반짝’ 윙크라도 하려는 듯 순간적으로 눈 속에 들어왔다가 눈꺼풀을 깜빡이는 사이에 사라집니다. 순간에도 윙크의 그림자가 눈썹에서 떠나기에 싫은 듯 붙었다 떨어집니다. 천천히 걸으며 낯선 고장을 찾아가듯 이리저리 둘러봅니다. 경칩이 지나서일 까요? 회양목과 소나무 이파리에 생기가 보입니다.
‘저건 뭐야?’
저만치 줄지어 선 나무에 노란빛이 눈에 들어옵니다. 햇살의 잔영이라도 되는 거야 하는 마음에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발걸음이 가까워질수록 노랑이 선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녹두 알만한 덩어리가 팥알만 해지고 또다시 작은 콩알만큼 커졌습니다. 산수유입니다. 내가 관심을 두지 않고 있는 사이에도 가슴을 부풀리고 있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손이 꽃망울로 다가갔습니다. 만지려다 그만두었습니다. 따뜻한 온기에 혹시 데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신 한 뼘을 사이에 두고 ‘호’ 입김을 불어넣어 보았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듯 내일은 더 크게 부풀어 오를지 누가 알겠습니까. 여태껏 기다렸으면서도 성급하기는 하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쳐 갑니다.
갑자기 휘파람 소리가 들렸습니다. 스마트폰에 문자가 오는 소리입니다. 내 눈보다 내 마음보다 더 활짝 핀 봄소식이 달려왔습니다. 지인의 문자입니다. 남쪽에 사는 여동생이 그곳의 꽃소식을 알려주자, 나에게도 전달합니다. 활짝 핀 매화, 산수유입니다. 그보다 과수원의 꽃눈을 정리하는 농부의 손길에 눈이 머뭅니다. 동영상이군요. 사다리에 올라 가지의 눈을 따며 봄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나도 공원의 둑으로 올라갔습니다. 산수유 가지 끝을 내려다봅니다. 몽글몽글 봄이 피어납니다. 오늘은 약속 시간을 어겨도 좋을 듯싶습니다.
“왜 이리 늦은 거야.”
“봄바람이 나서 그렇겠지! 늦어도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