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091. 기다림 20240310

by 지금은

모과가 떨어지기를 기다립니다. 첫 눈발이 날리던 날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모과나무를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오로지 한 나무, 애착이 대단합니다. 주변의 모과나무들은 눈발이 보이기 전에 이미 열매를 모두 떨어뜨렸습니다. 이 나무만큼은 끈기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새봄은 관심에 두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삼월이 되었습니다. 어느새 열흘이 되었는데도 모과 네 알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나뭇가지를 움켜잡은 채 햇살을 만끽합니다. 모과나 나무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기다림’


기다림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겨울이 다가오자, 겨울의 맛을 느끼며 잠시 기분에 취했는데 머지않아 봄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추위가 싫었습니다. 미끄러운 눈길이 조심스러웠습니다. 지루하다 싶었는데 아랫녘으로부터 봄소식이 전해오더니만 어느새 품속을 파고들었습니다. 곧 꽃이 피고 새잎이 돋고 새들의 지저귐이 활발해질 겁니다. 꽃구경도 지루하다 싶으면 여름을 기다릴 것입니다. 덮기는 해도 이글거리는 태양을 피해 그늘을 찾고 물속에 첨벙거릴 겁니다. 네가 여름의 맛을 알겠어, 물고기의 꿈을 꿉니다. 마음과 몸이 지쳐가는 듯합니다. 가을을 동경합니다. 기다림입니다. 또다시 겨울을 기다립니다. 이렇게 계절의 기다림이 순환됩니다. 어느새 일 년, 이 년 하는 사이에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내일을 기다리고 누군가를 기다립니다. 아니 변화하는 나 자신을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기다린다는 의미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희망을 기대하기도 하고, 괴로움이나 슬픔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랄 수 있습니다. 아무런 생각이 없이 지나기를 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존재의 허무감, 소멸에 대한 깊은 내면을 담고 있습니다. 혼란 속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해 무의미함을 앞에 두고도 어떤 것을 기다리며 살아가야 할지 찾아봅니다. 책의 내용에는 인간의 삶에 관한 허무와 상실을 그리면서도 한편으로는 깊은 위로와 희망이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삶의 무의미함을 느끼면서도 기다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삶이란 그런 게 아닐까 합니다. 오늘보다 내일이 나을 거라고 하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삶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기다림이 나를 끌어가는 원동력이 아닐까 합니다.


어느 책을 읽다 보니 기다림은 아름다운 선물이랍니다. 우리가 만나고 싶은 사람 중에는 빨리 왔으면 좋을 것 같은 사람도 있지만 간절한 기다림보다 좀 더디게 와도 행복할 것 같은 커피 향처럼 은은한 사람도 있다고 했습니다. 시골 버스에 관한 에피소드입니다. 한여름의 시골길을 버스가 달리고 있었습니다. 먼지로 뒤덮인 버스는 불가마처럼 뜨거웠습니다. 어디쯤 달리는데 가로수 그늘 밑에서 한 젊은 군인이 손을 들자, 버스가 멈췄습니다. 군인은 커다란 배낭을 안고 버스 맨 앞 좌석에 앉았습니다. 하지만 버스는 떠나지 않습니다. 승객들이 구시렁구시렁하다 소리쳤습니다. 이때 운전사가 창밖을 가리켰습니다. 승객들의 눈이 한 곳으로 모아졌습니다. 멀리서 젊은 여인이 부지런히 논둑을 뛰어오고 있습니다. 버스를 향해 손짓까지 하는 모습이 어지간히 급한 모양입니다. 승객들은 잠시 여인이 올 때까지 버스에서 내려 개울가에서 세수하고 바람도 쐤습니다. 잠시 후 여인이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버스에 타지 않았습니다. 운전사가 빨리 타라며 소리쳤습니다. 여인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맨 앞 좌석에 앉은 젊은 군인에게로 가서 창밖으로 내민 손을 잡으며 인사를 했습니다.


“몸성히 잘 다녀오시오”


“걱정하지 마라”


여인의 손을 아쉬운 듯 놓지 않았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승객들은 너나없이 한바탕 유쾌하게 웃었습니다. 즐겁고 흐뭇한 웃음입니다. 버스는 다시 먼지를 일으키며 여인을 뒤에 남겨둔 채 매미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로수 사이로 멀어져 갔답니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내용을 음미해 봅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삶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기다림의 끝은 어디일까. 요즘 나의 기다림은 무엇일까 잠시 먼 하늘을 바라봅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