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늦은 가을날의 시작 20240316
모르는 작가가 얼굴과 이름을 밝히며 신문을 같이 읽자고 했습니다. 혼자 읽어도 되는데 읽어주기까지 한다고, 부스스 떠진 눈이니 반가울 수밖에 없습니다. 버튼을 눌렀습니다. 분명 여자인데 남자의 목소리입니다. 읽어준다는데 남녀를 꼭 구분해야겠습니까. 그냥 함께 읽기로 했습니다. 글줄을 따라 눈과 귀가 따라갑니다. 인터넷 신문의 좋은 점이군요.
단풍이 사그라지는 가을날입니다. 드디어 아내와 원하던 탁구를 시작했습니다. 운동하기에 가까운 장소를 발밑에 두고 그동안 먼 곳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걷기, 수영, 축구 등입니다. 그렇다고 뭐 하나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아마추어 중에도 최하급이라면 맞습니다. 목적이 건강을 유지하는 곳에 두었으니, 기능이 좋을 리 없습니다. 안 하는 것보다야 낫겠다는 마음입니다. 그렇다고 욕심까지야 없겠습니까. 제대로 하려면 배움터를 찾아가야 하는데 시간도 시간이지만 필요한 게 있지 않습니까. 바로 경제력입니다. 이 나이에 돈까지 들여가며 배워야 할까, 방법만 알면 되지 하는 마음입니다. 생각해 보면 시간도 시간이지만 돈을 들여야 제대로 배우고 할 수 있다는 것쯤은 아내를 보아도 알고 있습니다.
아내는 배우는 데 돈을 들이는 편입니다. 가끔 나의 불만스러운 목소리에 슬그머니 하고 싶은 말을 숨길 때도 있습니다. 결혼 후 아이를 낳고 집에서만 지내자, 건강이 나빠졌다며 한동안 에어로빅에 빠져 지냈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했으면 장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연습 시간을 거르지 않고 틈을 내어 참가했습니다. 지나고 나니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동안 몸이 좋지 않다며 자다 깨어 몸을 주무르고 거실을 서성이더니만 증상이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아직도 꾸준히 이어오는 것이라면 서예입니다. 내가 권해서 시작된 일이지만 도서관 모임에서 동호회로 옮겨 개인 지도까지 받습니다. 내가 붓을 들게 한 일이니 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내는 뭐든지 하려면 제대로 배워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한 마디로 학습비를 지불해야 합니다. 노력한 결과 작가의 대열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이에 반해 내 생각은 다릅니다. 나는 어깨너머로 배웁니다. 진도가 늦을 수밖에 없고 기본기가 부족합니다. 이렇다 보니 하다 중도에 포기하는 때도 있습니다. 곧잘 한계를 느낍니다. 고비를 넘기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얻은 게 있습니다. 아내의 서예처럼 내게도 꾸준함이 있습니다. 바로 글쓰기입니다. 도서관, 복지관, 평생학습관 등 무료 강좌를 하는 곳이 있습니다. 부지런히 찾아다녔습니다. 글쓰기에 관한 책도 여러 권 읽었습니다. 가끔 글쓰기 공개 모집에도 응모합니다. 가뭄에 콩 나는 듯 몇 년에 한 번씩 반가운 소식을 듣기도 했습니다. 남이 보면 글 내용을 어떻게 평가할지는 몰라도 쓰면서 몇 년 전부터 차곡차곡 정리하다 보니 꽤 많은 작품이 모였습니다. 한 번 ‘펑’ 터뜨릴 날을 기대합니다.
아내와 처음 살림을 차렸을 때만 해도 서로가 생각하는 방향이 달랐습니다. 아내는 음악 이야기를 주로 했고 나는 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프로야구입니다. 쉬는 날이나 야간 경기가 있는 때는 텔레비전을 끼고 살았습니다. 백인천 선수가 홈런을 쳤어요. 이종도, 이만수, 김봉연……을 들먹입니다.
“뭐 하는 사람인데요.”
야구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축구, 농구, 탁구 등의 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아내가 어느 날 내 옆자리에 슬그머니 다가왔습니다. 우리나라 대표선수들이 월드컵에 나가 외국팀과 겨룰 때입니다. 박지성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화면에 비친 모습을 손가락으로 가리켰습니다. 그 후로 가끔 다가와 다른 선수의 이름을 묻곤 했습니다. 이후 자연스레 야구와 축구, 탁구, 양궁 배드민턴 등으로 범위가 넓혀졌습니다. 유명 선수의 이름을 알게 되자 자연스레 경기 규칙에 대해서도 물어봅니다. 나도 음악의 세계에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아내가 결혼하기 전까지는 음악에 관심이 많았답니다. 어려서부터 피아노와 하모니카 등 몇 가지 악기 연주를 배우려고 학원을 찾았습니다. 좋은 작품을 감상하는 날이면 작가와 작품 그리고 그 시대에 대해 조언을 구합니다. 자연스레 말하는 기회가 늘어났습니다.
‘신문을 같이 읽으실래요.’를 기고한 작가도 우리와 하는 짓이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편은 운동에, 자신은 문학에 관심이 있습니다. 남편의 말입니다. 야구 선수 ‘오타니’를 모르다니, 아내가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를 좋아한다고 하자 태어나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라고 했다는군요. 우리는 타인 취향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서리가 내린 늦은 가을날입니다. 점점 추워지면 바깥출입이 뜸해질 거라며 아내를 탁구장으로 유혹했습니다. 라켓 잡는 것도 서툴던 아내와 나 사이에 네트를 가운데 두고 공이 왕복 점프를 수없이 합니다. 어느새 탁구 경기를 보며 선수 이름과 규칙을 이야기합니다. 늦은 밤이면 차 한 잔 탁자에 놓고 ‘구노의 아베마리아, 슈베르트의 가곡, 쇼팽의 녹턴.’ 등을 감상합니다.
신문을 같이 읽을까요? 미술 감상은 어떨까요? 무엇이면 어떻습니까. 서로에게 관심을 기울이다 보면 통하는 게 있게 마련입니다. 모두가 건강한 마음, 건강한 몸으로 이어지는 삶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