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오늘의 버킷 20240324
동호회원 중 늦은 나이에 산을 선택한 분이 있습니다. 주일에 한 번 만나 문학에 관해 공부하며 의견을 나눕니다. 나는 그와 많은 말을 나누지 않지만 말씨나 외모에서 풍기는 느낌에 호감이 갑니다. 활달하고 씩씩한 성격에 가끔 본받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 아침에 휘파람 소리가 들렸습니다. 내 스마트 폰의 모임방 알림음입니다. 핸드폰을 열었다니 벌써 산 입구에 가 있습니다. 아침 식사를 막 끝낸 시간인데 그는 이미 산행하는 중입니다. 회원들의 응원 글귀가 뒤따릅니다.
재작년입니다. 글의 소재를 이야기하는 중에 버킷리스트로 주제가 모아졌습니다. 수강생들이 돌아가며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들 가운데 우선해야 할 것을 하나씩 말했습니다. 나는 희망 사항으로 여행을 손꼽았습니다. 일 년에 한 번쯤은 해외여행을 해야겠다고 했습니다. 퇴직 후 한 동안 마음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외국말을 할 줄 모르는데 문제가 생기면 어쩌지’
처음에는 두려웠지만 한두 번 여행을 끝내고 나니 긴장감이 서서히 사라졌습니다. 언어에 능통하면 좋겠지만 부족하더라도 만국 공통 언어가 있지 않습니까. 다소 답답하기는 해도 손짓 몸짓으로도 통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들 사이에서도 눈짓이나 손가락 하나로 통하는 게 있지 않습니까.
그가 우선으로 꼽은 버킷은 산행입니다. 산이라고 가본 곳은 가까운 동네의 낮은 산이라고 했는데 죽기 전에 우리나라의 명산 100곳을 오르겠다고 했습니다. 10년이면 되지 않을까 하는 예상을 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오르는 것을 계획한다면 3년이면 족하지만 이렇게 저렇게 빠뜨리는 주가 있으니, 여유를 두고 실천하겠다고 했습니다.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나이니 10년 안에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의 평균 수명이 80세를 조금 상회하니 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는 오늘도 산을 오릅니다. 일요일이면 거의 매번 빠짐없이 소식을 전해옵니다. 산악회원들과 줄지어 비탈을 오르는 모습, 산 정상에서 이정표를 끌어안고 흐뭇해하는 정경이 건강해 보입니다. 잠시 점심때 전후로 정상의 소식을 전해올 것입니다. 내일 아침이면 한시(漢詩) 한 수를 보내올 것입니다. 한문에 조예가 깊은 그는 언젠가부터 한시를 지어 우리에게 내보였습니다. 처음에는 낯선 글귀에 호감이 가지 않았습니다. 한문 실력이 부족한 나에게는 낱자를 읽기도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글귀를 해석하고 의미를 이해하는 일이 보통 어려운 게 아닙니다.
20·30대의 일입니다. 가끔 한자를 대할 때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당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기본 한자에도 익숙하지 못해 일어난 일입니다. 가족은 물론 학교나 회사에서도 종종 눈총을 받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기분이 상했습니다. 언젠가 생각해 보니 그냥 지나갈 수 없다는 마음에 한자를 익혀야겠다고 마음을 굳혔습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관심을 기울이는 동안 나중에는 손에 쥘 수 있는 내 나름대로 한자 단어 암기 책자를 마련했습니다. 3500자입니다. 중·고등학교 때 영어단어를 암기하기 위해 단어장을 만들어 손에 쥐고 다닐 때처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수시로 꺼내보았습니다. 자신이 붙자 우리 조상들이 남긴 한시를 읽어보기도 했습니다. 풀이는 할 줄 몰라도 가끔 몇 글자를 제외하고는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눈에 가까이하다 보니 마음에도 다가옵니다. 외면하던 그의 시를 눈여겨봅니다. 고맙게도 뜻을 풀이하여 알립니다. 실력이 부족하지만 이제는 뜻을 보기 전에 한시를 훑어봅니다. 알 듯 말 듯하기도 하고 아예 까막눈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우리글로 풀어쓴 내용을 보면서 ‘아! 그런 거야’하고 이해를 합니다.
서로 만나 서먹서먹하던 분위기가 풀리고 옅은 농담을 할 사이가 되자 하루는 나에게 부탁할 말이 있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써놓은 에세이가 있는 데 원고를 수정해 달라고 합니다. 아직도 내가 쓴 글에 확신이 서지 않는데 남의 글을 보아줄 실력이 되지 못한다는 마음이 들어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내 실력이 아직 미치지 못하니 강사에게 부탁하는 게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 양반 늘 바빠서’하고 말을 흐립니다. 대신 당산은 한문에 관해 학식이 높으니 다른 사람에게 강의를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운을 뗐습니다.
며칠 전에 반가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내 말이 통했는지 평소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다른 동호회 모임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알게 모르게 다방면에 걸쳐 숨은 실력자들이 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우리 글쓰기 반에는 동화를 쓰는 작가와 화가도 있습니다. 컴퓨터 동영상을 만드는 재주가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분은 팔순이 가까워지는 나이에 자신의 재능을 펼쳐보고자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뉴스를 보니 이보다 열 살이나 많은 분도 계십니다. 배움이란 나이에 관계가 없습니다. 버킷도 그렇습니다.
올해 나의 버킷리스트 중 일 번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글을 쓰는 것입니다. 어제는 주제가 떠오르지 않아 올해 들어 처음으로 이런저런 문구를 나열하다가 몽땅 지우고 말았습니다. 쓸모없다고 생각해 버렸지만 그냥 놔둘 걸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못 쓸 것에서의 쓸모’ 누가 압니까. 나중에 글감이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의 버킷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