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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꽈리의 추억 20240320

by 지금은

지난가을 안면도에 간 일이 있습니다. 물 빠진 갯벌을 바라보며 해안을 돌아보고 오는 길에 미술관에 들렸습니다. 학생 수 감소로 문을 닫은 학교를 단장하여 설치 미술의 장을 마련한 곳입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운동장을 들어서자 미술품보다도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꽈리입니다. 한 무더기의 꽈리가 얼굴을 붉힌 채 나를 바라봅니다. 너무 짙지도 않고 옅지도 않은, 붉지도 않고 노랗지도 않은 주홍색입니다. 오랜만에 보는 꽈리라서 저절로 발이 멈췄습니다.


초등학교 때의 일입니다. 학교에서 돌아오자 여동생이 ‘뽀르륵, 뽀르륵’ 개구리 울음소리를 냅니다. 꽈리를 부는 소리입니다.


“어떻게 소리를 내는 거야.”


동생이 꽈리를 입에서 꺼내 보이며 설명했습니다. 울타리 밑에 붉게 물든 꽈리를 땄습니다. 핀으로 꼭지를 찔러 구멍을 넓혔습니다. 손으로 꽈리를 조몰락조몰락했습니다. 말랑거리자 조심스레 씨를 한 알 한 알 빼냈습니다. 입을 입구에 가져가 내용물을 남김없이 빨아냈습니다. 맛이 이상합니다. 덜 익은 토마토의 맛이라고 해야 할까? 바람 빠진 공처럼 되었습니다. 동생이 새 꽈리를 입에 물었습니다. ‘뽀르륵 뽀르륵’. 나도 꽈리에 바람을 불어넣고 입에 물었습니다. ‘꾀릭꾀릭’ 제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바람을 다시 넣어 입에 넣었습니다. 원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동생이 내 입을 바라보더니 그게 아니고 하면서 시범을 다시 보였지만 생각같이 되지 않았습니다.


“가르쳐 주려면 제대로 가르쳐 주어야지.”


핀잔을 주며 불기를 멈췄습니다. 동생이 얄밉습니다. 내 마음을 헤아릴 생각이 없이 다시 꽈리를 불어댑니다. 미소를 지으며 나를 놀리는 것만 같습니다.


이웃집 누나가 물동이를 이고 다가와 담장 너머로 다정하게 앉아있는 우리를 바라보았습니다. 어린 동생이 꽈리를 부는 게 신기했나 봅니다. 빈 물동이를 내려놓은 채 내 옆에 다가앉았습니다.


“뭐야, 어린 동생도 부는데 아직도 안 되는 거야. 입구를 아랫입술 안쪽에 대고 윗니로 살짝 물듯 바람을 빼주면 뽀드득뽀드득”


나는 꽈리를 불어본 일이 없습니다. 그동안 버들피리 외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여자들이나 하는 것으로 생각했는지 동네에는 꽈리를 부는 남자는 없습니다. 누나는 동생의 꽈리를 건네받더니 ‘꽈르륵 꽈르륵’ 잘도 붑니다. 큰 개구리의 울음소리 같습니다. 내가 눈이 뚫어져라 누나의 입을 쳐다보자, 너도 불어보라며 꽈리를 내밀었습니다. 공기를 힘껏 불어넣었습니다. 꽈리가 탱탱하게 부풀어 올랐습니다. 입에 넣고 입술로 누르는 순간 ‘풀썩’ 공기가 빠지고 말았습니다. 너무 세게 힘을 주었을까요. 꽈리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누나는 잘 익은 꽈리를 따서 조물조물하더니 동생의 핀을 받아 능숙하게 꼭지의 구멍을 뚫고 내용물을 빼냈습니다. 입에 넣고 불어보고 내게 내밀었습니다. 누나의 입 모양을 생각하며 다시 불었습니다.


“얘, 너는 아무리 해도 안 되겠다.”


누나는 저녁 준비를 해야 한다며 빈 물동이를 손에 든 채 사립문을 나섰습니다.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키 큰 나무들이 햇살을 받으며 단풍을 곱게 물입니다. 꽃밭에는 칸나, 해바라기, 달리아, 맨드라미, 들국화를 비롯한 꽃이 학교의 가장자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군데군데 꽈리가 꽃을 피운 듯 점을 찍었습니다. 관리인에게서 꽈리 한 줄기를 얻어 벤치에 앉았습니다. 아내와 나는 어렸을 때 하던 것처럼 알맹이를 손가락으로 조물조물했습니다. 속이 텅 빈 꽈리를 아내가 먼저 입에 물었습니다. ‘꽈드득꽈드득’할 거라는 예상이 빗나갔습니다. 어렸을 때 잘 불었다는 말과는 달리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나도 기억을 더듬어 불어보았습니다. 소리가 나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맞아, 내가 분 것은 고무 꽈리였지.”


변명할 말이 없었는지는 모르지만, 고무 꽈리는 잘 불었답니다.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 시절 고무 꽈리를 문방구에서 팔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꽈리는 한 번 불고 나서 좀 지나면 껍질이 말라버려 다음에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고무 꽈리는 찢어지지만 않는다면 몇 날 며칠이라도 불 수 있습니다. 여자아이들에게 인기가 있었습니다.

여러 명이 동시에 불어대면 교실 안은 꼭 개구리들의 작은 연못이 됩니다.


“꽈리 부세요? 나도 좀……”


우리 또래의 여인이 벤치로 다가왔습니다. 알맹이를 내밀자 능숙하게 손을 움직였습니다. ‘꽈득 꽈드득’ 소리가 쏟아집니다. 아내가 그의 입술을 자세히 바라보자 입을 살그머니 벌려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꽈륵꽈륵’ 아내의 소리가 입술을 타고 흐릅니다. ‘픽’ 내 소리는 깨졌습니다. 아무래도 터지지 않는 고무 꽈리를 하나 사야 할 것 같습니다. 요즘 문방구에서 팔기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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