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신분의 서열 20240416

by 지금은

어느 날 아침입니다. 울타리 너머로 늘 보이던 아랫집 식구가 보이지 않습니다. 집이 절간이라도 되는 양 조용합니다. 다른 때 같으면 굴뚝으로 연기가 오르고 마당을 쓰는 소리, 세수하는 소리가 나야 합니다. 아침을 먹고 나서도 조용하기에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슬그머니 그 집의 사립문으로 들어섰습니다. 정돈된 마당, 부엌에는 흩어진 땔나무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니 있습니다. 검은 무쇠솥이 햇빛에 반짝입니다. 뒷마당으로 돌아갔습니다. 녹슬고 낡아 못 쓰게 된 호미와 구멍 난 바구니가 벽에 걸려있습니다. 다시 앞마당으로 나왔지만, 햇빛에 물든 마당은 조용합니다.


집으로 돌아와 삼촌에게 물었습니다.


“돌석이 영 감네 식구들이 어디 갔나요. 보이지 않아요.”


“밤에 몰래 떠났다.”


영감의 아들 천식이는 삼촌과 나이가 같은 청년입니다. 둘이 있을 때는 너니 나니 말을 주고받지만 남의 눈에 뜨일 때는 말씨가 달라집니다. 삼촌에게 존댓말을 하고 삼촌은 평상시대로 예사말을 합니다. 친구인데도 말씨가 다를 때가 있어 물었습니다. 천식이와 그 아비는 상놈의 자손이라서 그렇다고 했습니다. 그 집을 빼고 우리 동네 사람은 모두가 양반인가 봅니다. 나이 순서에 따라 말씨가 다른데 천식이네 만큼은 나이에 관계없이 동네 사람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존댓말을 씁니다. 이와는 반대로 동네 사람은 그들에게 예사말을 합니다.


그보다 더 생각지 못한 일이 있었습니다. 설날 아침입니다. 동네 사람들이 웃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세배를 드렸습니다. 우리 집 순서가 되었습니다. 젊은이들이 할머니께 세배하고 사랑방에 모였습니다. 영감과 천식이도 할머니를 찾아뵙고 사랑방에 왔습니다.


“도련님들께도 세배를 드려야지요.”


영감이 젊은이들을 향해 섰습니다. 이때 천식의 얼굴이 갑자기 붉어졌습니다. 눈치챈 사람들이 손을 저었습니다.


“세배는 무슨…….”


천식이가 아버지의 손을 끌고 방을 나갔습니다. 떠나기 전날 천식이가 삼촌을 찾아왔답니다. 이제는 상놈으로 살기 싫어 낯선 고장을 향해 떠나기로 했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 남아있던 신분제도의 민낯입니다.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중에는 노비제도와 신분제도의 폐지가 들어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개혁안은 하루 이틀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후로 점차 변화를 보이지만 어느 곳엔가는 그 잔재가 남아있게 마련입니다. 우리 고장이 그중 하나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가끔 항렬이 우선일까 나이가 우선일까’로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마다 떠오르는 것이 천식이네 부자의 모습입니다. 우리와는 친척이 아니지만 나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감이 천식이 연배에게 세배하겠다고 머리를 조아릴 때입니다. 이들과 항렬이나 나이를 비교할 대상은 아니지만 왠지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습니다.


설날이나 추석 때는 문안 인사를 드리기 위해 큰할아버지 댁을 찾았습니다. 집성촌이고 보니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삽니다. 두 집을 빼고는 모두가 친척입니다. 말을 하거나 인사를 할 때 서열을 가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경우 나이가 많은 사람이 적은 사람에게 절을 하는 일이 있습니다. 성격에 따라 다르겠지만 맞절을 하는 사람도 있고 나이가 적음에도 앉아서 절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항렬이 먼저일까. 나이가 먼저일까에 따라 상황이 달라질 수 있겠다 싶습니다.


중학교 때입니다. 종친회에서 항렬과 나이에 대해 의견은 나누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간단히 정리해 봅니다. 항렬을 우선시하는 사람은 ‘항렬이 혈족 간 서열과 위치를 구분하는 문중의 규율이기 때문에, 나이보다 항렬이 먼저이다’라고 말합니다. 나이가 먼저라고 주장하는 사람은‘나이는 하늘이 내리고 항렬은 사람이 만들었기 때문에, 항렬보다 나이가 먼저이다’라고 합니다. 듣고 보니 이날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집안의 모임이 있을 때마다 가끔 시끄럽다고 했습니다.


어느 글을 읽다 보니 전통적 관점에서 나이와 항렬의 관계를 말한 대목이 있어 소개합니다. 유복친족(有服親族)과 면복친족(免服親族)으로 구분 짓습니다. 유복 친족은 상복을 입는 관계로 8촌까지입니다. 이는 나이보다 항렬이 우선입니다. 면복친족은 8촌을 초과하는 경우입니다. 나이가 항렬을 앞섭니다. 하지만 이 모두가 나이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차이가 크게 나면 존댓말을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나이를 정할 수는 없지만 「소학(小學)」과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참고하면 어떨까 합니다. 내 나이의 배가 되면 어버이처럼, 10년이면 형처럼, 5년이면 어깨를 나란히…….


하지만 요즘에는 복(服)이 있다고 생각하는 범위는 할아버지 자손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결론이라면 항렬이나 나이를 알아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민이 사라진 시대에 서로를 존대하는 마음이 우선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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