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하루 20240526

by 지금은

“오는 거여?”


“가는 거여.”


친구의 전화에 싱겁게 대답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초등학교 동창 모임입니다. 늘 같은 장소에서 만남을 이어가다 보니 특별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다릅니다. 같은 식당, 같은 커피숍에서 수다를 떨다 헤어지는 때와는 달리 점심 후 장소를 밖으로 옮기기로 했습니다. 우리의 모임 장소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동굴입니다. 몇 년 전부터 친구가 은근히 자랑하며 재촉했는데 대부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모임은 맛있는 음식, 멋진 장소보다는 만나는 데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남자들만의 만남이지만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떱니다. 늙음을 서러워하는 나이에도 누에게 실을 뽑아내듯 이어지는 이야기에 하루를 보냅니다.


약속 시간을 어기면 동굴 입장이 어렵다기에 보통 때보다 20여 분 일찍 집을 나섰습니다. 하지만 도착하고 보니 ‘땡’하고 초등학교의 수업 시작종을 울리는 시간에 맞추어 교실에 들어서는 듯 만남의 장소에 발을 디뎠습니다. 발걸음이 느린 것도 아니고 차가 제 시간을 어긴 것도 아닙니다. 전철에 올라 책을 보다 보니 내려야 할 역을 몇 정거장이나 지나쳤습니다. ‘아차’ 하는 순간 재빨리 내려 지나친 거리만큼 되돌아가야 했습니다. 약속 시간을 잘 지키는 내가 하마터면 기록을 깨뜨릴 뻔했습니다.


식사하는 중입니다.


“동굴은 다음으로 미루고 중랑천 장미축제에 가는 게 어때?”


뜬금없이 친구가 말했습니다.


이유를 들어보니 요즘 장미꽃이 만발해서 장관(壯觀)이랍니다. 우리나라 장미원 중 제일 긴 거리이며 꽃송이도 제일 많답니다. 장미는 한때 피고 지니 때를 놓치면 내년에나 볼 수 있다며 동굴은 계절과 관계없이 구경할 수 있으니 다음 달에 가자고 합니다. 오후부터 비 온가 온다며 옆 친구가 걱정합니다. 저녁때부터 내린다 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장미원에 도착했습니다. 말 그대로 장미가 터널과 함께 양옆으로 긴 줄을 만들었습니다. 전철 두 정거장을 이어 붙인 것과 같은 거리라 꽤 긴 거리입니다. 몇 발짝을 걸으며 주위를 살펴본 나는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고장과는 달리 장미가 어느새 꽃잎을 떨어뜨리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눈을 여기저기 옮기는 순간 굵은 빗줄기가 보입니다. 많은 사람이 우산을 받쳐 들었습니다. 걷는 동안 장미보다 우산에 신경이 쓰입니다. 색깔이 다양하기도 하지만 서로 부딪칠까 봐 요리조리 우산 든 손은 물론 발걸음도 신경이 쓰입니다.


우리들 다섯 사람 중 두 사람만 우산을 준비한 상태입니다. 함께 쓰고는 있지만 한쪽 어깨가 서서히 젖어듭니다. 한 친구는 비를 온전히 맞고 있습니다. 방수된 옷이랍니다. 혼자라면 장미 감상을 포기하고 어딘가로 숨어들었을 겁니다. 수다를 입에 물고 함께 움직이다 보니 비 맞는 것이 대수롭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하굣길에 비 맞던 모습을 떠올립니다.


“책보자기 가슴에 안고 달렸잖아.”


“달리면 뭐 해, 몇 발짝 가지 못해 온몸이 물구덩이가 된걸.”


어느새 옷이 눅눅해지더니만 겉옷이 빗물에 젖어 팔에 달라붙습니다. 슬그머니 한 손을 들어 털어보지만, 물먹은 옷은 차가움을 지닌 채 제 모습을 찾을 생각이 없습니다.


붐비던 사람들이 굵어지는 빗줄기를 피해 하나둘 자리를 떠납니다. 장미 터널이 한가해졌습니다. 우산이 서로 교차해도 부딪칠까? 신경이 쓰이지 않습니다. 하늘을 가린 벤치에 이르자 친구가 부르르 몸을 떱니다.


“추운 거야?”


“화장실.”


이 친구는 벌써 몇 차례 화장실을 들락거렸습니다. 날씨 탓이라는군요.


잠시 후 우리는 음식점에 들렸습니다. ‘따뜻한 것 주세요.’ 하는 말에 음식점 종업원이 메뉴판을 내밉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