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 책 한 권 넣고 떠난다. 20240913
추석이 눈앞에 가까워졌습니다. 달궈진 더위는 요지부동, 식을 줄을 모릅니다. 긴 연휴에 무엇을 하고 지낼까 궁리하던 중 조카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토요일 날 집으로 왔으면 하는 전갈입니다. 장기간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아버지를 모셔와 점심 대접을 하기로 했다며 함께할 것을 부탁합니다. 이야기를 듣는 순간 곧 수락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어머니, 아버지 찾아뵐 생각이었는데 잘 됐구나.”
형님이 병원신세를 지는지도 여러 해가 흘러갑니다. 나이 탓이기는 해도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올해는 유난히 더운 해입니다. 열대야가 관측 이래 제일 긴 여름이라고 합니다. 추석이 다가오고 있건만 무더위는 아직도 떠나기가 싫은 모양입니다. 며칠 사이에 주춤하든 것 같더니만 이내 고개를 들었습니다. 낮이야 뭐 더 말할 게 있겠습니까. 더 이상의 강한 더위 표현은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며칠 전 집 가까이 있는 대학에서 평생학습 중 'Well Dying'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듣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좋을까’입니다. 하지만 예전에 들은 강의 내용과는 좀 다른 면이 있습니다. 좋은 죽음을 부각하기보다는 죽기 전까지 좋은 삶을 이어가는 내용입니다. 잘 살아야 죽음 또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날의 주제는 버킷 리스트를 작성하는 것입니다. 각자 생각한 바를 기록하고 몇 사람씩 조를 짜서 서로의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주제를 이야기하는 중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여행에 관심이 모아졌습니다.
“이제는 장거리 여행은 포기해야 할까 봐요.”
여행을 좋아한다는 옆 사람의 말입니다. 그동안 유럽, 동남아시아, 미국을 비롯한 여러 곳을 다녔다고 합니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한동안 여행을 자제하다가 다시 나들이를 꿈꾸는데 몸이 예전 같지 않아 걱정이라며 특히 남편의 건강이 좋지 않아 장거리 이동은 포기해야겠다는 말을 남깁니다. 나의 긴 여행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유럽에 치우쳐져 있군요. 왠지 이곳에 마음이 끌려 몇 해 동안 마음을 두었습니다. 여행을 좋아하는 아내도 걱정을 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장거리 여행은 몸이 말을 듣지 않을 거랍니다. 겉보기에는 나보다 더 건강해 보이는데 마음속의 의식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아직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남들과 비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인지 모르겠습니다.
다소 서운해하는 표정을 보면서 나의 일상을 이야기했습니다. 여행은 꼭 먼 곳이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코로나가 유행할 시기에는 내 집 주변을 주로 다녔습니다. 산책이라는 말이 어울릴지 모릅니다. 걷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점차 반경을 넓혀 이웃동네, 또 다른 이웃동네입니다. 인천의 구 시내를 돌면서 골목길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어릴 때의 추억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코로나가 주춤하면서는 서울로 발길을 옮겨갔습니다.
‘책 한 권’
나의 여행은 둘입니다. 아내와 함께 작은 가방을 하나 어깨에 메고 간간이 집을 나섭니다. 서울을 볼 게 많습니다. 번화가, 골목길, 시장, 고궁, 박물관……. 눈이 바쁜 하루입니다. 전철 안에서는 책이 눈으로 다가오고 밖으로 나가면 주위의 풍경들이 눈을 빼앗습니다.
봄까지 계속되던 발걸음은 여름이 되면서 갑자기 멈춰 섰습니다. 내 발길을 끊은 범인은 더위입니다. 기상과 함께 시작되는 후텁지근함은 하루해를 넘겨도 마찬가지입니다. 밤이라고 해서 좀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잠자리가 불편해서 몇 차례 장소를 옮겨갑니다. 침실에서 거실로, 거실에서 서재로, 잠을 설치며 이동에 이동을 합니다. 종종 물을 끼얹기도 합니다. 그때뿐 별로 달라진 기분은 없습니다.
이 추석에는 무엇을 할까? 형님을 만나는 것 외에는 특별히 정해진 게 없습니다. 갑자기 빨간 물통이 떠올랐습니다. 작은 휴대용 컵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앙증맞게 그게 뭐예요. 한 모금밖에 안 들어가겠구먼.”
“가방이 작아서 찾아낸 것이라오.”
환경보호를 위해 일회용을 쓰지 말자는 구호를 떠올린 결과입니다. 하지만 내 컵의 장만이 환경보호에 도움이 될지는 모릅니다. 집안에는 다양한 컵이 있는데 또 샀으니 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컵은 평생 내 곁을 지킬 것입니다.
축하의 의미로 서울 구경을 시켜야겠습니다. 이 추석의 연휴 기간에는 흐르는 땀을 보충하기 위해 몇 모금의 물을 담아 가보지 못한 곳을 찾을 생각입니다. 시집과 물병이 함께하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다음 강의 시간에는 자랑을 해야겠습니다. 남대문 시장에서 가장 맛있는 수수호떡을 사 먹었다고.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여행의 즐거움이란 꼭 먼 곳에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