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 이 또한 지나가리라 20241023
아라뱃길에 물보라가 다가옵니다. 멀리서 보이던 검은 물체가 드디어 모습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먼동과 함께 얼굴을 드러냈습니다. 멀리 보이던 검은 점과는 다르게 육중한 체구를 지녔습니다. 내 눈 가까이 다가오자 그 크기에 비례해서 물보라와 함께 물결이 마구 일렁입니다. 곧 배가 서서히 옆모습을 감추고 뒷모습을 보입니다. 이마저도 물결을 거스르며 사라집니다. 배가 선명하게 남긴 강물의 자국이 이내 흐트러지며 지워집니다. 물보라에 뒤지지 않으려는 듯 부글부글 꼬리에 포말을 일으키던 모습 역시 주위의 물에 녹아들었습니다.
어제는 상강(霜降)의 기온답지 않게 새벽부터 비가 내렸습니다. 집 앞 연못에 내리는 빗방울이 흙바닥에 닿는 것에 비해 제법 굵어 보입니다. 장소의 차이입니다. 땅과 연못을 경계로 내리는 빗방울이 크기가 다르면 얼마나 다르겠습니까. 연못을 때리는 빗방울은 큰 원을 그리며 퍼져 나가더니만 그만 물결 속으로 자취를 감춥니다. 다른 빗방울이 그 자리를 채웁니다.
나는 물방울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우리의 심정을 떠올렸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이와 비슷한 게 아닐까 합니다. 살다 보면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휘말리는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내가 하고자 하는 중요한 일이 풀리지 않을 때, 순조롭던 일상이 깨져버릴 때, 나와 가까이했던 사람이 잘 못 되었을 때 등,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급작스레 다가오기도 합니다. 이중 나에게 큰 실망을 안긴 일은 어머니의 사망입니다. 평소에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던 때문입니다. 교통사고로 한 순간 이별을 해야만 했습니다. 소식을 듣는 순간 하늘이 곧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앞이 노랗게 변하며 다리에 힘이 풀렸습니다. 어지러운 머리를 진정하고 ‘아닐 거야, 아닐 거야.’ 하는 말을 곱씹으며 병원으로 달렸습니다. 세찬 바람과 함께 물보라가 나를 외워 쌉니다.
‘그 또한 지나가리니.’
못 살 것만 같은 마음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평정심을 찾게 되었습니다.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갈 때 막힐 것만 같던 느낌, 세월이 지나다 보니 이제는 맛있는 음식을 찾아 음식점을 방문하기도 합니다.
며칠 전에도 마음 상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잘 아는 지인이 고독사를 했습니다. 지나고 나면 후회가 남습니다. 죽음 뒤에는 어느 경우보다 애잔하고 쓴 마음이 밀려옵니다. 무엇이겠습니까.
‘고인이 살아있을 때, 한 번이라도 더 만나고 한 번이라도 따뜻한 말을 하고, 한 번이라도 더 맛있는 음식을 대접할걸.’
한 번이라도 더, 하는 느낌의 연속입니다.
작년에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처럼 이번 경우도 한 달이 지나자 마음의 일렁이던 물결이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합니다. 사람이 지닌 것 중 보고 듣고 말하고 기억하는 등, 좋은 것이 많지만 또 하나 덧붙이라면 망각을 들 수 있습니다. 잊을 수 있다는 게 삶에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를 깨닫는 순간입니다. 특히 ‘괴로움이나 슬픔’ 말입니다. 우리는 평소에 망각을 원망하지 않지만 어찌 보면 잊을 수 있다는 것은 인류의 최대 행복 중 하나일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망각을 걱정합니다. 일찍부터 겪은 일입니다. 놀이에 정신이 팔려 숙제를 까맣게 잊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선생님께 꾸지람을 듣기도 하고 때로는 벌을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약속이나 할 일을 잊어 낭패를 본 일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나라고 해서 특별한 경우는 아니고 많은 사람이 비슷한 경험을 간직하고 있다고 예단합니다.
하지만 망각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크나큰 선물이라 생각합니다.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의 세세한 모든 일을 기억하고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우리 두뇌의 기억 용량을 초과하여 문제를 일으킬지 모릅니다. 또 다른 면에서는 사람들 사이에 용서와 화해가 더 힘들어지지 않을까 합니다. 슬픔의 오랜 간직은 일상생활에서의 기쁨을 반감시킬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과거를 잊을 수 있다는 것은 기억만큼이나 중요합니다. 하지만 나는 중요한 일을 잊지 않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합니다. 머릿속에 넣고, 메모를 하기도 하고, 달력에 표시를 하기도 합니다. 때론 휴대폰이나 컴퓨터에 저장을 합니다. 이렇게 단속을 해도 순간 깜빡하는 수가 있습니다. 어쩌겠습니까. 다시 다짐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기억한다는 것과 잊어버린다는 것은 우리의 생활에 있어서 모두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기계적으로 기억할 것은 기억하고 잊을 것은 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삶이 아니겠습니까. 잊을 만한 것은 잊고 기억해야 할 것은 잊지 않도록 마음 쓰며 살아야겠지요. 잊어도 좋을 것, 기억해야 좋을 것 모두 내 안에 있습니다. 둘 다 중요하기에 때로는 갈팡질팡하기도 합니다. 과거가 아름다운 이유는 기억보다는 망각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난 일은 다가올 날에 비해 좀 덜 중요하다 생각하면 마음이 편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저러고 한 소리 듣게 되었습니다. 약속을 깜빡했습니다.
‘바람 맞힌 거야?’
친구의 음성이 들리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