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톡’ 은행 한 알

한알

by 지금은

가을바람이 산을 넘어오자, 노란 잎들이 하나둘 하늘로 흩날렸습니다. 우뚝 솟은 은행나무 아래, 작고 반들반들한 은행 한 알이 ‘톡’ 하고 떨어졌습니다. 처음 세상에 나온 은행은 들뜬 마음으로 주위를 살핍니다.

“아, 햇살이 따뜻해! 바람 냄새도 좋아!”

그때 낙엽 하나가 휘날리며 내려앉았습니다.

“처음 나왔구나, 은행아. 조심해, 요즘 사람들은 우리 냄새를 싫어한단다.”

“냄새를 싫어해요? 왜요?”

“음, 구린내 때문이지, 옛날에도 싫어하기는 했지만 지금 같지는 않았어. 한때 사람들은 너희를 약재로 귀하게 썼기 때문이야. 몸을 따뜻하게 하고, 병을 낫게 한다며.”

은행은 눈이 동그래졌습니다.

“정말요? 그럼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겠네요!”

낙엽은 바람에 흔들리며 빙긋 웃었습니다.

“물론이지. 하지만 세상은 변하잖니. 이제는 길가마다 은행나무가 심겨 있어서, 사람들은 그 냄새를 피하고, 떨어진 열매를 치우느라 바쁘단다.”

그 말을 들은 은행은 서운해졌습니다.

“나는 그저 가을의 열매일 뿐인데.”

그때 학교에서 하교하던 아이들이 달려왔습니다.

“으악, 은행 밟았어! 냄새가 진동한다.”

“조심해! 신발에 묻으면 큰일이야!”

아이들이 눈을 찡그리며 은행을 피해 달아났습니다. 은행은 속상해서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이 냄새가 그렇게 싫은 걸까?”

이튿날, 같은 아이들이 은행나무 곁의 운동장에 나타났습니다.

“얘들아, 은행으로 놀아보자! 이걸로 구슬치기처럼 굴리면 재밌어.”

한 친구가 주머니에서 은행을 꺼내 손바닥 위에서 굴리며 자랑했습니다. 그러자 몇몇 아이들이 손사래를 쳤습니다.

“냄새가 심한데 꼭 이런 걸 가지고 놀아야겠어?”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아, 할머니가 겉껍질을 깨끗하게 없애고 물에 담가 냄새를 뺐거든. 구워 먹으면 맛있어.”

친구들이 은행을 받아 들었습니다.

“누구의 은행이 제일 멀리 갈까?”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은행은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그래, 나도 누군가를 즐겁게 해줄 수 있구나.”

며칠 뒤, 마을은 단풍으로 붉게 물들었다. 하늘은 높고, 바람은 더 차가워졌습니다. 은행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속삭입니다.

“나도 언젠가 큰 나무가 되어 오래도록 서 있을 수 있을까?”

그때, 산에서 내려온 바람이 조용히 말했습니다.

“은행아, 용문사라는 절에 아주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단다.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지.”

“천 년이요? 그렇게 오래요?”

“그래. 전쟁이 지나가도, 사람들의 세상이 바뀌어도 그 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모든 계절을 맞이한단다. 봄에는 새순을 틔우고, 여름엔 그늘을 주고, 가을에는 노랗게 물들어 세상에 빛을 흩뿌리지.”

은행은 그 이야기에 숨을 죽였습니다.

“그 나무는 외롭지 않았을까요?”

바람이 미소 지었습니다.

“외롭지 않아. 사람들은 그 나무 아래에서 기도하고, 바람은 그 잎을 어루만지며 안부를 전하니까. 세월을 견디며 수많은 생명을 보듬은 존재란다.”

은행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작게 떨었습니다.

“언젠가 나도 그런 나무가 될 수 있을까?”

바람이 대답했습니다.

“물론이지. 작고 냄새나는 열매라도, 시간이 지나면 너도 누군가에게 그늘을 주는 나무가 될 거야. 사람들은 냄새를 잊어도, 가을의 빛은 잊지 않거든.”

그날 밤, 은행은 하늘을 바라보며 살짝 미소 지었습니다.

‘그래, 나도 언젠가 누군가의 기억 속에 서 있을 거야. 용문사 은행나무처럼, 오래도록 조용히.’

눈처럼 흩날리는 낙엽 사이로, 작은 은행 한 알이 흙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었습니다. 겨울이 오면 땅속에서 잠들고, 봄이 오면 새싹이 되어 다시 세상과 만날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 그 나무 아래서 이렇게 말하겠지요.

은행나무를 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따뜻해져. 가로수 길은 노란 가을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