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정리 20230603
‘이렇게 감이 안 와서야.’
며칠 동안 고민의 연속입니다.
그림책을 만들어야 하는데 마음의 정리가 되지 않습니다. 줄거리는 완성되었는데 그림이 문제입니다. 스케치도 어느 정도 끝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어떤 재료를 써서 어떤 기법으로 해야 할지 망설여집니다. 작년에도 구상은 일찍 했지만 그림 솜씨가 부족하다 보니 완성했지만, 동료들의 책에 비해 가치가 떨어진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집을 나섰습니다. 이 책 저 책을 뒤적이고 이 생각 저 생각을 떠올려 봤지만, 수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밖을 쏘다니며 눈동냥, 귀동냥, 소리 동냥을 해야겠습니다. 가끔은 뜻하지 않은 성과를 얻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배움의 습관이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제일 먼저 떠올린 곳은 학교입니다. 주위에 있는 초·중·고등학교를 둘러보고 싶었습니다. 교내로 들어가지는 못해도 주변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뭔가 영감을 얻을 것 같습니다. 횡단보도를 건너다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갑자기 화랑을 떠올렸습니다.
‘맞아, 평생학습관 있지.’
어쩌지요, 가는 날이 장날입니다. 스마트폰을 켜고 확인해 보니 며칠 후에나 전시회가 열린답니다. 이왕 생각했으니 반대편 컨벤시아 화랑으로 가봐야겠습니다.
입구에서 안내판을 들여다봤습니다. 무료입장입니다. 마음 놓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평일 점심시간이라서 그런지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느긋한 심정으로 차근차근 작품을 둘러보았습니다. The Fool 작가의 〈참 나를 찾아서〉와 <한바탕의 봄꿈>입니다. 색감의 차이가 있고 기법도 각각 차이가 있습니다. 작품 하나하나마다 발걸음을 멈추고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내가 차고자 하는 그림과는 멀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느낌에 그 자리를 쉽게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림을 둘러본 후 좀 더 알고 싶어 도록을 손에 들었습니다. 머물러 있기에 좋습니다. 포근한 소파가 있고 더구나 아무도 없으니 주변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내 눈이 책에 빠져있는 사이에 누군가 옆으로 다가왔나 봅니다.
“그림을 그리시는 분인가 봐요.”
머리가 허연 노년의 여인이 옆으로 다가왔습니다. 전시장을 관리하는 사람인지 큐레이터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왠지 그의 세련된 옷차림에서 가까이하기가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그의 다정한 안내와는 달리 마음이 움츠려집니다. 책에 눈을 떼지 않자 그는 쑥스러운 듯 자리를 피했습니다.
사실은 마음속으로 말하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내가 그리려는 그림책과 차원이 달라 선 듯 말을 꺼낼 수가 없었지만 마음 같아서는 꼭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아니 상담이라고 하는 편이 맞습니다. 갤러리를 떠나면서 때늦은 후회를 했습니다.
‘밑져야 본전인데, 그림책과 꼭 맞지 않아도 뭔가 얻는 게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생각지 못한 지식이나 상식을 내 것으로 만들 기회를 하나 잃었는지 모릅니다.
오늘은 왜 그랬는지 모릅니다. 다가와 주는 사람을 애써 외면했습니다. 전에는 갤러리에 들렀을 때 먼저 말을 건네고 그들의 작품에 관해 이야기를 듣고 간단한 기법을 알기도 했습니다. 나는 그림을 보는 눈이 세밀하지 못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들에 관해 관심을 기울이는 정도입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습니까. 다시 말하면 내 안의 만족입니다.
‘누구의 작품이었더라.’
보기는 봤는데 작품과의 연결이 안 되거나 작가를 모를 때가 있습니다. 문득 화법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화가마다 자신만의 고유 기법이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입니다. 고흐, 모네, 피카소, 칸딘스키……. 그들의 화풍은 다릅니다.
“맞아”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정리가 필요합니다. 언젠가 작곡가들의 음악을 감상하다 그들의 곡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으로 돌아와 나만의 밴드를 만들었습니다. 작가에 따른 대표 작품을 몇 점씩 모으기로 했습니다. 생각이 났을 때 서둘러야 합니다. 지나고 보면 어느새 잊게 됩니다. 공원으로 거리로 쏘다녔지만, 오늘은 나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얻지 못했습니다. 대신 정리의 필요성을 얻었습니다.
며칠 후에 다시 갤러리에 들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혹시 누가 압니까. 이번에는 그녀가 다가오기 전에 내가 말을 걸어야겠습니다.
“저, 그림에 대해서는 무뢰한인데요.”
솔직하게 그림책을 만들고 싶은데 엄두가 나지 않아 시작도 못 하고 있다며 도움 아닌 도움을 청해볼까 합니다. 그 사람의 그림 수준이 높아 별 도움이 되지 않을지, 또는 너무 높아 쉽게 해결해 줄지 누가 알겠습니까. 생각을 해보니 손을 내밀어야 손바닥 위에 뭔가 올려지겠다 싶습니다. 빈손이면 어떻습니까. 시도해 본 것으로 만도 시작이 되는 것이라 여겨집니다.